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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 백일장 1

조선오이 삼형제의 예찬

안종진 인천포스코고등학교 퇴임

사학연금공단에서 연계해준 공무원연금공단의 은퇴자 공동체 마을 입주자로 선정되어 작년 4월부터 11월까지 주흘산 자락의 지곡리 태극기 마을에서 삶을 가꾸었다. 잡풀이 무성한 휴경지를 빌려 삽과 쇠스랑으로 텃밭을 일구며 땀 흘려 살았던 지난 8개월 동안, 도시와 농촌의 상생을 도모하고 귀농·귀촌 체험이라는 프로그램의 취지를 온몸으로 흠뻑 느꼈다. 산비탈에 맞닿아 있던 우리 밭은 멧돼지들의 놀이터였다. 처음 멧돼지의 흔적을 보고 잔뜩 겁을 먹었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고 나니 멧돼지들이 땅을 1m 간격으로 헤집어 잡풀이 없는 곳이 많아 오히려 밭을 일구기가 한결 수월했다. 이장님은 주흘산의 멧돼지가 새끼와 함께 겨울철 철분 보충을 위해 땅속 지렁이를 찾아 가족 나들이를 나온 덕이라 하셨다.

이렇듯 초보 농부의 무지를 일깨워주기 위한 마을 주민의 지도 조언은 100평 규모의 텃밭을 일구고 작물을 재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새봄이 되어 자급자족과 나눔의 기쁨을 상상하며 텃밭에 호박, 옥수수, 상추 등 10여 종의 종자를 파종하고 고추, 수박, 오이, 가지 등의 모종을 구입하여 심었다. 일을 하다 허리를 펴고 땀을 닦으며 멋진 주흘산 주봉을 바라보던 나는, 이 텃밭을 ‘지혜공유농장’이라 부르기로 했다. 2019년에 인천 송도의 지혜공유학교를 열어 학부모교육을 통해 자녀의 역량을 성장시킨 경험을 농작물에 접목하기 위함이다. 모든 생명체로부터 살아가는 지혜를 얻고 함께 상생하자는 가치와 의미를 부여했다.

텃밭의 모든 작물이 새싹을 올리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6월 중순경이었다. 밭 가장자리에 이름 모를 새싹 세 포기가 살포시 얼굴을 내밀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종자를 파종한 기억이 없는 곳에 싹을 튼 정체불명의 녀석들을 뽑으려다가 잡초와는 다른 모습으로 여겨져 지켜보기로 했다. 텃밭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발로 밟아 버릴 것 같아 영역 표시로 보호 막대를 세웠다. 수시로 관심과 물을 주어가며 키우는 중에도 무슨 식물인지 도통 알 수 없어 녀석들과 함께 호기심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오이 같기도 하고 수세미와도 비슷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도 시원스럽게 대답해 준 사람은 없었다. 새싹들이 성장하여 줄기를 뻗고 꽃을 피워 꿀벌들을 초대했지만, 열매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조심스럽게 줄기를 살펴보는데 잎 속에 숨겨진 2~3cm 정도의 열매를 발견하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고 열매가 성장하며 녀석들이 오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가 여기에 오이를 심었단 말인가? 언덕 아래로 여러 갈래의 줄기를 내린 오이가 조금 더 성장한 후, 비로소 작지만 야무진 조선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경 전통 오일장에서 5월에 사 심었던 개량오이 모종 5개는 열심히 키워 봤지만, 고작 대여섯 개의 오이를 선물하는 데 그쳐 실망스러웠다. 처음 핀 꽃에서 맺힌 개량오이는 크고 먹음직스러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열매는 작아졌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양의 오이가 더는 열리지 않았다. 옛날부터 논밭의 농작물들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개량오이와는 달리 지혜공유농장 초입에서 잡초처럼 자란 조선오이의 성장을 바라보는 일은 행복과 환희의 시간이었다. 잡초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수많은 오이를 아낌없이 선물하는 조선오이는 식탁의 보물이었다.

주흘산 자락에 초록의 여름이 오고, 조선오이 삼형제는 3m 떨어진 단호박 넝쿨과 어우러져 햇볕을 받기 위한 경쟁을 시작했다. 당당히 고개를 쳐든 조선오이의 줄기와 잎은 경외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조선오이 삼형제는 단호박 넝쿨과의 경쟁에서 틈새 공략으로 맞서 싸워 승리했으며 더 멀리 사방팔방으로 줄기를 뻗어 나에게 오이가 주는 기쁨을 선물하였다.


서리가 내려 잎과 줄기가 무너져 내릴 때까지 수십 개의 오이를 생산하여 마을 주민과 나누는 즐거움도 안겨주었다. 조선오이는 강인한 자생력으로 긴 장마와 폭염을 온몸으로 극복하였다. 조선오이는 우리 선조의 얼을 닮아 척박한 환경에서 스스로 당당히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늦가을에는 잡풀과 잎 속에 열매를 꼭꼭 숨겨서 번식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늙은 오이에서 씨앗을 채취하여 올해 다시 조선오이의 당당함을 보려고 한다. 척박한 땅에서도 슬퍼하지 않고, 돌봐주지 않아도 주인을 탓하지 않고, 주변의 어떤 잡풀과도 슬기롭게 공생하는 조선오이 삼형제를 예찬한다. 누가 뭐래도 2020년 지혜공유농장의 최고의 선물이었다. 여러 가정의 식탁에서는 입맛을 당기며 젓가락을 유혹하는 첨병 역할을 하였다. 조선오이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신의 몸을 내주고 생을 마감했다. 그 생명력은 그 어떤 개량오이보다도 질기고 오래 살았으며 번식력이 강했다.

돌이켜 보니 조선오이 삼형제에게 부끄러웠던 순간이 떠오른다. 귀한 보물을 몰라보고 뽑아서 버리려고 했던 내 마음을 성찰한다. 이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을 믿지 않기로 했다.
올해 또다시 녀석들을 만나게 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렌다. 이번에는 더 많은 조선오이 후손들이 번성하도록 사랑으로 알뜰살뜰 도울 것이다. 조선오이들의 또 다른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한아름의 조선오이는 또 한 번 마을 주민의 식탁에서 기쁨이 될 수 있으리라. 조선오이 삼형제를 예찬한다. 그대 이름은 조선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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