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삶’을 말하다  >  인생일기 2
 
인생일기 2
글. 이우상(한일여자고등학교 퇴임)
언제 누가 심었는지도 모르는 아름드리 벚꽃나무들이 양 길가에 줄지어 늘어 서 있는 시골, 바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마을이다. 태고부터 뭇 생명들을 길러낸 어머니 젖줄 같은 감천내가 흐르는 마을이었다. 냇물 따라 길게 펼쳐진 잔디밭에서 친구들과 소 풀 뜯기고 기마전 하고 씨름도 했다. 그러다 냇물로 달려가 알몸으로 풍덩뛰어들어 물장구치고 자맥질하며 놀다 보니 어느새 친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나 혼자 냇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큰 소리로 친구들 이름을 부르다 꿈에서 깨어났다. 아무리 다시 잠을 청해도 꿈에 본 고향마을이 눈에 아롱거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숨을 길게 내쉬며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 반, 더듬더듬 라디오를 켜니 ‘세월 따라 노래 따라’ 방송이 흘러나온다. 꿈에 본 고향 마을이 선명하게 떠올라 잠은 천리만리 달아나 버린다.

나는 마을 친구 중 가장 먼저 기차를 타고 가장 먼저 대구 구경을 해본 어린이였다. 고모님이 대구로 시집간 덕분에 초등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를 따라 난생처음으로 기차 타고 대구에 갔다왔다. 그러고 나서 친구들에게 비둘기호의 특징과 스쳐 지나가는 바깥 산천의 모습, 기차 안 풍경들, 기차 안에서 삶은 계란과 땅콩 사 먹은 일등을 자랑하여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던 옛날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고모님이 사주신 책가방을 반 친구들이 돌아가며 등에 메고 교실을 한 바퀴씩 돌기도 했던 기억까지. 잠이 날아간 이른 새벽 이런저런 사연을 가슴에 품고 있자니, 고향 떠나온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노래, 오기택의 ‘고향무정’이 갑자기 떠올랐다.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있네.’ 얼마 전, 가 수 오기택이 휠체어에 의지한 채 KBS 가요무대에 나와 다른 가수가 대신 부르는 ‘고향무정’을 입만 달싹거리며 따라 부르는 모습에 모두가 눈시울 붉히며 힘찬 격려의 박수갈채를 보냈었다. 어느새 세월이 흐르고 보니 고향무정이 인생무정으로 바뀐 듯하다.
그 시절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고향무정’은 허무적 색채가 짙다는 이유로 당시 권력층으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했다. 그 옛날 유년의 기억들을 좇아 골목길을 거닐면서 옛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다. 올해도 추석을 앞두고 열차표 예매는 시작한 지 채 몇 분이 안 돼 매진되고 말았다니, 도대체 고향이 무엇이기에 그렇게도 애타게 그리워하며 찾는 것일까? 고향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태어나 자라난 곳’, 또는 ‘제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으로 설명하고 있다.
내 아들 세대에게는 고향이라는 말이 관심 밖의 단어가 되어 버린 것만 같다. 아마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들먹일 수 있는 마지막 세대는 바로 지금의 우리가 아닐까 생각하니 어째 씁쓸하기까지 하다.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조상도, 부모도, 친구도, 고향도 필요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하기야 세상이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변해 버린 현실에 고향에 대한 미련을 강요하는 것도 무리한 일이지만 아직도 고향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기에, 허물어지고 누추한 시골집이 더없이 정겹고 소중한 것이 아닐까. 마음은 아직 어린 시절 그대로인데 어느새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회갑(回甲)을 오래전에 넘기고 고희(古稀)마저도 훌쩍 넘고 말았으니, 어지간한 모임에 가면 최고령자에 해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어릴 적 그렇게 많던 친구들은 먼곳, 아니면 영원히 먼 곳으로 떠나가고 집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회관에만 할머니들 몇 분이 모여 앉아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할 뿐, 온 마을이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감돈다. 고향이 그리운 건 아마도 향수병일 듯싶다. 아주 어릴 적 낮에는 제기차기, 자치기 등으로 해가 질 때까지 놀았고, 저녁이면 친구 집에 모여 희미한 호롱불 켜놓고 종이딱지, 성냥개비 알 따먹기로 시간을 보냈으며, 고등학교 시절에는 여학생들과 어울려 밥도 해 먹으면서 꿀맛 같은 시간을 보낸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도 죽을 때는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향한다는데, 고향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리움이 오늘따라 이른 새벽에 꿈을 통해 글로 이어지게 한다. 아무도 읽어 주지 않아도 그저 유년의 기억들을 더듬어 보는 가슴 따뜻한 새벽 시간이다. 고향엔 많은 언어의 색깔이 쌓여 있는 곳, 낙엽을 밟던 그리움의 색깔이 있고, 골목길 추억의 색깔이있다. 고향은 눈으로 보는 색깔뿐만 아니라 가슴속에 그려 넣을 그림의 모든 색깔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훈훈한 정이 담기는 감동의 항아리 속에 기쁨과 슬픔의 눈물을 함께 담았던 곳. 소중했던 꿈들이 뿌연 안개처럼 사라졌지만 동심의 꿈이 가득히 쌓여지던 곳, 그래서 고향은 꿈을 가지고 마음으로 만져보며 가슴으로 느끼는 곳이다. 이웃과 이웃이 마주 보며 더불어 살아가는 곳, 서로가 보이다 안 보이면 불안하고 아쉬워 서성이는 곳, 그래서 고향은 눈으로 흘기면서도 가슴으로는 정을 주며 사는 곳이다. 꿈을 꾸며 서로의 인생을 챙겨주는 곳이기에 명절만 되면 고향을 찾게 된다. 성주와 인접하고 있는 고향에는 한때 사드 설치 문제로 난리를 치렀다. 이 모두가 생존권 차원을 넘어 고향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겠는가. 오기택의 ‘고향무정’을 쓸쓸하고 황량한 노래로만 생각지 않고 가슴으로 정을 주는 노래로 승화시키고 싶다.
<인생일기> 독자 참여 안내
「사학연금」에서는 연금수급자 선생님의 일상이 담긴 수필작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학연금과 관련된 연금수급 에피소드, 제휴복지서비스를 이용한 가족여행 등 다양한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채택되신 분께는 소정의 상품권을 드립니다.
  • 원고분량 : A4 1장 반 내외(글자 크기 10포인트 기준)
  • 참여방법 : magazine@tp.or.kr로 이름, 전화번호와 함께 작품을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