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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글. 정선숙(일성여자중학교 퇴임)
나는 요즘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 시, 소설, 수필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읽다 보면 글 속에 내가 있는 듯하다. 시는 작가의 심상에 맺힌 아름다운 언어로 호사스러움을 맛보게 하는 청량제 같다. 소설은 가공의 삶을 통해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평론은 읽으면 어려운 듯하지만 내가 똑똑해지는 기분이 든다. 나는 진솔한 삶을 그린다는 점에서 수필이 제일 좋다. 이태준의 <문장 강화>에 수필은 ‘심적 나체다’라는 말이 나온다. 수필을 쓰려면 먼저 자기의 풍부가 있어야 하고, 자기의 미가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수필은 허구가 아닌 글쓴이의 체험이어서 더한 호기심을 불러온다. 잔잔하게 궁금증을 자아내는 수필을 읽다 보면 마치 지식이 많은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수필은 그래서 재미있다. 어떤 수필은 교훈을 주고, 몰랐던 상식을 주기도 한다. 또 법정 스님의 <무소유> 같은 수필은 마음을 다스리게 한다.

교직 생활 동안 교재 연구 등 글 쓰는 일을 많이 했다. 수업 시간에 연계 학습, 간접 교육의 한 과정으로 수업과 관련된 사회, 역사 등에 관한 것들을 조사하고 연구도 해야 했다. 영어 교사라는 직업은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서 다른 학문이나 음악, 미술 같은 예술 외에도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둬야 한다. 그 덕에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대답을 꽤 잘 해주는 엄마였다. 그런데, ‘수필’을 쓰려고 하니 내가 반쪽 인생을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나이 되도록 나만의 에피소드도 없고, 내 감정에 충실한 감상문 한 편도 없었다. ‘자기의 풍부’는 혹 몰라도 ‘자기의 미’는 내면보다는 외모에 더 신경 쓴 듯한 생각이 들었다.퇴직하고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일상에 얽매여서 바쁘게 산 것만 보인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바쁜 삶 속에서 틈틈이 내가 좋아하는 문학 관련 독서도 하고, 각종 문화 예술 공연 관람도 했더라면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새벽에 출근하는 일도, 밤늦도록 붙잡고 있을 일도 없어졌다. 여유를 가지고 시작한 독서의 세계는 청소년기에 꿈을 키웠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읽기에서 쓰기로 연결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언니가 사다 준 <엄지 공주> 동화책이 떠오른다. 아주 작은 글씨로 인쇄된 누런 종이 한쪽 귀퉁이에 엄지 공주가 그려져 있었다. 동화책은 초등학교 옛날 교과서 크기였다. 내가 어렸을 때는, 특히 시골에서는, 수준에 맞게 동화책을 사다 주고 자녀의 독서를 위해 고민하는 어머니는 없었다. 대부분 학교에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동생들 돌보랴, 집안일 하랴, 농사일 거들랴,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친구도 있었다.나는 언니, 오빠들과 나이 차이가 큰 덕에 전혀 다른 환경이 조성되었다. 어머니는 늘 바빴다. 작은오빠는 고등학교에, 셋째언니는 초등학교에 교사로 고향에 와 있었다. 언니나 오빠의 방에 들어가 보면 읽을 책이 너무 많았다.
강신재 작가의 <젊은 느티나무>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결혼해서 가까이 사는 언니 집 책꽂이에 꽂혀 있는 ‘여류작가전집’의 책을 많이 읽었다. 지금은 ‘여류’라는 말이 이상하지만, 예전에는 여류 화가, 여류 시인 같이 별도의 호칭이 있었다. 한말숙, 손소희, 최정희 등의 작가가 쓴 작은 문고판 책은 들고 다니기에도 좋았다. 고등학교 때 작은오빠 방 책꽂이에는 재미있는 책이 특히 많았다. 그중에 하드커버로 된, 두껍고 좀 큰 책인 <춘향전>에 놀란 기억이 난다. 내가 아는 <춘향전>과 내용이 많이 다른, 정말 이상한 책이었다. 너무 놀라 책을 덮고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읽었던 <춘향전>은 야한 부분이가위질 된 학생용이라면 그 책은 전문이 실린 책이었다.

고2 때까지는 입시에 신경을 안 쓰고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읽으며 마음 편히 보냈다. 세로 줄로 인쇄된 세계명작전집은 내게 다양한 지식을 주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도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다. 주옥같은 장편, 단편들은 읽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감동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대학을 다니러 서울 큰오빠네로 갔다. 큰오빠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서울로 갔다. 명절, 부모님 생신 등 1년에 서너 번 고향에 올 때만 봐서 매우어려웠지만 함께 살다 보니 아버지와 비슷한 부분이 많아 정이 갔다. 네 명의 조카에 나까지 얹혀 있으니 올케언니가 힘들어 할 것 같아 시간 나는 대로 집안일을 도왔다. 카프카는 큰오빠의 서재를 청소하다 만났다.

읽고 싶은 책 서너 권을 챙겨 침대 맡에 두고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면서 읽는 독서의 맛은 참으로 꿀맛이다. 청소년기에는 좋은 성장을 위해 독서를 했다면, 지금은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독서를 한다. 그러다 보니 좋은 글은 좋은 글대로, 다소 실망스러운 글은 그것대로 재미있고, 글쓴이까지도 마치 아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책을 읽어 가는 중에 깨달음이 있고, 반성이 있고, 지혜가 더해지는데, 그 바탕 위에 내 글을 써 볼 생각이다. 읽는 것은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만, 쓰는 것은 내 철학이 쌓여야 한다. 자기 사색없이 주관이 쌓일 리 없으니 이제야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사(多思)가 실감 난다.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쓰려고 하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이 새롭다. 수필이 ‘심적 나체’인 이유도 써 보려하기 전에는 막연한 수사(修辭)에 불과했다. 이제는조금 알겠다. 진솔한 수필을 쓰다 보면 ‘심적 나체’와 같은 상황이 된다는 것을. 수필 쓰듯 정제된 삶을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