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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바람 따라
글과 사진. 박동식(여행작가)
기원과 이야기를 품은 해안 길
이틀 동안의 비바람은 물러갔지만 하늘에는 먹구름이 여전했다. 그러나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푸른 기운을 잔뜩 품은 구름은 낮게 내려앉아 있었고 바다를 건너온 바람은 포근한 봄 향기를 품고 있었다. 가파도가 이보다 아름다운 날은 많지않을 것만 같았다. 선착장에 내려 곧바로 해안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해안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가파도를 온전히 한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간간이 올레길을 알리는 리본이 여행자를 반겨주었다. 자전거를 탄 여행자들이 까르르 웃음소리와 함께 나를 추월하기도 했다. 서쪽 해안가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보름바위’였다. 높이가 4m에 이르는 둥근 바위는 못난이처럼 울퉁불퉁한 모양새였다. 가파도 사람들은 함부로 올라가지 않는 바위다. 바위에 사람이 올라가면 태풍이나 강풍이 몰아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위 위에는 사람 대신 누군가의 소망처럼 작고 납작한 돌들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속삭이듯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남쪽해안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고냉이돌’을 만날 수 있었다. ‘고냉이’는 ‘고양이’를 뜻하는 제주말이다.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바위의 모양이 고양이를 닮았다고 해서 그 같은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고양이보다 목을 길게 뺀 거북이를 더 닮은 듯 보였다. 마라도를 볼 수 있었던 곳도 그곳이었다.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 가파도는 제주 본섬과 마라도 사이에 자리 잡은 섬이다. 크기는 마라도의 2.5배. 마라도는 해안 일부가 수직으로 깎인 절벽 형태지만 가파도는 섬 전체가 납작 엎드린 모양새다.
가파도의 남쪽 해안을 돌면 하동마을이다. 가파도는 북쪽의 상동과 남쪽의 하동에만 사람이 거주한다. 하동마을에서 ‘까마귀돌’과 ‘하동 할망당’ 안내판을 보았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안내하는 이정표는 없었다. 무작정 포구 끝으로 향했다. 그리고 긴 방파제 어디쯤에서 ‘하동 할망당’을 만났다. 테트라포드 너머 해안에 작은 사각 제단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하동 할망당’은 하동 주민들이 2년에 한 번씩 풍어제를 지내는 곳이다. 삶의 터전인 바다에서의 무사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곳. 오늘도 누군가 그곳에 음료수를 올렸고, 제단 안에 걸려 있는 무명천에는 천 원짜리 지폐를 붙여두었다. 바닷사람들의 간절함이 묻어있는 제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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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가파도 해안 길 / 02  가파도 고냉이돌
방파제 끝에서 ‘까마귀돌’로 짐작되는 바위를 볼 수 있었지만 정확한 이정표가 없어서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안내판에 적혀 있던 ‘포구 근처 큰 바위’가 유일한 단서(?)였다. 형태가 까마귀를 닮았다고 했지만 여행자의 눈에 까마귀를 닮은 바위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양이가 거북이로 보인 것처럼 큰 바위도 어느 지점에선가는 까마귀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서쪽 해안에서 보았던 ‘보름바위’처럼 가파도 사람들은 ‘까마귀돌’도 신성시 여겼다. 때문에 ‘까마귀돌’에도 함부로 올라가지 않았다. 행여 바위에 올라갔다가는 즉시 태풍과 파도가 몰아친다고 여겼다. ‘보름바위’에 전해오는 이야기와 동일했다. 그만큼 바다는 늘 두려운 존재였다. 작은 섬이지만 ‘하동 할망당’ 이외에도 상동 마을 해안에 위치한 ‘상동 할망당’과 매년 정월에 2박 3일간 제를 지내는 ‘짓단’까지 있는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포구 인근 가게 안에서 해녀 한 분을 만났다. 가게에 마실 나온 참이었다. “사람들이 보며는 예, 시간에 쫓겨서 오는 거라. 여유를 갖고 해안도로 한 바퀴 돌고 보리밭 사이 걸어 봐요. 보리가 막 춤을 춰. 여가 고향인데, 이제 와서 보니 너무 아름다운 거라. 그 뭔 말로… 연애라고 하잖아요. 남녀가 만나는 거. 그때는 그런 느낌도 없었던 거 같아. 지금 아가씨라면 보리밭도 걸어보고, 그런 거라도 해봤으면, 그런 생각이 이제 막 들어. 그때는 너무 어렸고, 그런 감정도 몰랐고. 이제 뭐 연애를 해보남.”
그녀는 ‘연애’라는 말을 할 때 수줍게 웃었다. 올해 그녀 나이 쉰일곱. 섬에서 나고 자라 ‘연애’도 없이 결혼했고 그렇게 섬에서 뿌리를 내렸다. 행여 다시 아가씨가 될 수 있다면, 아름다운 보리밭 사잇길이라도 걸어보고 싶다는 그녀의 삶이 조금은 애틋했다.
“물질? 글쎄? 한 35년 됐나? 여기 사는 사람들은 어부, 해녀밖에 없었어. 해변가라 해수 때문에 밭도 보리, 콩 정도밖에 못 해. 그러니 젊은 사람은 해먹을 게 없으니 안 들어오잖아. 우리야 어쩔 수 없이 배운 게 그거라 이래 사는 거지.”
늙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자꾸 자신의 삶을 탓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가 몇 번이고 되뇌었던 말, 파란 보리가 자랄 때의 가파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제는 알겠다는 이야기. 그래, 나도 보리를 보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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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가파도 하동마을 / 04  가파도 하동 할망당
바람결 따라 춤추는 보리밭
보리밭은 마치 깨달음이라도 얻은 수도승처럼 조용했다. 좌우로 굽은 길은 바다로 향하고 있었고, 길이 직선으로 이어져 바다까지 건너면 우뚝 솟은 산방산이 보였다. 밭과 밭 사이에는 돌담이 길게 쌓여 있었고, 이따금 어떤 돌담은 예수님의 가시면류관처럼 날카로운 가시넝쿨을 이고 있기도 했다.
천천히 길을 걸었다. 아주 천천히. 크지도 않은 섬이니 가뜩이나 길은 짧았고, 이토록 아름다운 길을 성큼성큼 걷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걸어야 할 길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보리밭은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연애’를 말하며 걷고 싶었다던 보리밭. 이곳에 살고 있으니 언제든 원 없이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보리밭 사잇길이 아니라 진정 ‘연애’라는 것이었겠지. 어쩌면 길은 때로 사랑을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감정, 혹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여기며 꾹꾹 눌러두고 살았던 바람. 가만 생각하면 혼자 이 길을 걷고 있는 나도 조금 쓸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바다 끝에 다다랐다. 그리고 보리밭을 등지고 오래도록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때 바람이 불어왔다. 뒤에서 쏴~아~ 소리가 들려왔다. 보리가 바람에 눕는 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았고, 쉰일곱 해녀가 말했던 것처럼 보리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발길을 돌려 걸어온 길을 되밟았다. 그리고 섬 한복판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소망전망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평평해 보이는 섬이지만 그래도 가파도에서는 가장 높은 언덕이다. 예전부터 가파도 사람들은 이 주변을 ‘도대’라고 불렀다. ‘도대’는 ‘등대’를 뜻하는 제주말이다. 하지만 주변에서 등대의 흔적이 발견된 적은 없었다. 지금은 그곳에 대나무를 깃대처럼 세워두고 풍어제 오색기와 망을 보고 경계를 알리기 위해 사용하던 ‘당보기’를 걸어두었다. 가파도의 중심이니 어디를 보아도 온통 초록 물결뿐이었다. 난간에는 사람들이 적어둔 ‘소망’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시험 합격, 가족 건강, 만사형통, 내 집 마련…….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들이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소망’들처럼 때로 우리의 삶도 조금은 위태로워지기도 할 것이다. 그럴 때 다시 가파도의 보리밭을 걸으며 삶을 위로했으면 좋겠다.
상동 선착장에서 이제 막 배가 출발하고 있었다. 가파도를 떠나는 오늘의 마지막 배였다. 이제 섬은 오로지 내 것이었다.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허겁지겁 식당을 찾았다. 주문한 음식은 ‘돌문어 자장’. 몇 분 후 식탁에 놓인 자장면은 기대 이상이었다. 데친 돌문어를 납작하게 썰어서 면위에 올렸고, 보랏빛 가시리와 초록 돌미역이 곁들여졌다. 차마 비비기에 아까운 모양이었다.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맛보았던 자장면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어둠이 내린 후였다. 그리고 그때 나는 또 하나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붉은 해가 수평선 구름 아래로 서서히 몸을 숨기고 있었다. 가파도가 나에게 준 그날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을 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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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청보리밭 / 06  소망전망대
함께 들러보세요!

가파도 여객선
서귀포시 대정읍 운진항에서 출발한다. 소요 시간은 20여 분. 주말에는 사전 예약을 하는 것이 안전하다.
당일 예약은 불가하다
  • 주소 :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646-20
  • 예약 및 문의 : 064-794-5490, http://wonderfulis.co.kr
  • 운항 시간 : 운진항 첫 배 09:00, 마지막 배 17:00 / 가파도 첫 배 09:20, 마지막 배 17:20 / 운진항
    출발 16:00, 17:00 배는 왕복 불가.

가파도 청보리축제
약 18만 평 규모의 밭에서 자라는 청보리들을 감상할 수 있다. 가파도 자체도 아름답지만 섬에서 바라보는 제주 본섬의 풍경도 탁월하다. 축제 기간에는 소망 기원 돌탑 쌓기, 보리밭 연날리기, 커플 자전거대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 기간 : 매년 3월 말 ~ 5월 중순
한 번 맛보세요!

보말칼국수
가파도는 자장면, 짬뽕, 보말칼국수가 유명하다. 자장면과 짬뽕은 풍부한 해산물과 해초류를 이용한다. 맛은 물론이고 꼬들꼬들한 식감이 일품이다. 제주 향토음식 중 하나인 보말칼국수 역시 가파도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이다. ‘보말’은 ‘고둥’을 뜻하는 제주어이다. 가파도의 보말칼국수는 모두 가파도에서 채취한 보말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