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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일기 1
글. 이영호(서울 영도중학교 퇴임)
살아오면서 그동안 받아 간직해두었던 명함을 정리하기로 했다. 필요할지도 몰라 모아둔 명함들이 작은 상자에 가득 차 있다. 그중에는 고인이된 분도 있고, 외국으로 이민 간 분도 있고, 연락이 안 되는 분도 있다. 하나하나 선별해서 스마트폰 주소창에 입력해 놓고 필요 없는 것은 일요일 폐휴지 수거해가는 날 버리려고 비닐봉지에 싸서 휴지통에 넣었다. 순간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그마한 한 장의 종이에 불과하지만 함부로 버린다는 것은 그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생각에 나는 얼른 휴지통에서 꺼냈다. 아파트 뒤뜰화단에 가서 빈 깡통에 넣고 한 장 한 장씩 태우면서 그 사람과의 과거를 회상해 본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람들은 첫 만남의 시작으로 명함을 주고받는다. 명함에는 본인의 이름, 회사명, 직업과 직책, 전화번호, 근무처 주소, 이메일 주소가 들어가 있다. 여기에 더해 얼굴 사진까지 넣어서 만든 것도 있다. 따로 나를 소개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나에 관한 정보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명함은 나를 나타내는 ‘두 번째 얼굴’이라고도 한다. 명함은 사업을 하거나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특히 영업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회사 홍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 나의 경우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한동안 교사 신분증만으로 지냈는데 관리직이 되면서부터 명함이 필요하게 되었다. 명함의 사용은 나를 알리기 위함이지만 꼭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하고 남발하진 않았다.

선거 때가 되면 후보들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 유권자들에게 뿌리는 명함이 구겨진 채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길거리에 버려져 누군가에게 밟히고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몇 년 전 대만을 여행하면서 거리를 거닐다 보니 상호를 직접 붓글씨로 쓴 간판이 건물에 많이 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권 다툼으로 점주들이 서로 싸울 때 상대방의 간판을 돌로 쳐부수었다면 가장 큰 모욕감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명함 한 장이 그 사람의 인격을 비춰 주듯, 상호가 써진 간판 역시 주인의 신용과 상품의 품질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간판 역시 주인의 얼굴인 셈이다.
명함의 역효과도 있다. 과도하게 자신의 직함을 강조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경력을 부각시킨 과시용의 명함도 종종 본다. 그럴 때면 존경심 대신 오히려 위압감과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예를 들면 박사, 회장, 사장, 대학교수, 국회의원 등 사회적 또는 경제적 권위를 드러내는 직함을 가진 이들의 경우 더욱 소박하게 명함을 만들고, 정중하게 주고받아야 한다고 본다. 그들이 의도하지 않아도 직함 자체에서 모종의 위압감을 상대에게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명함을 악용하는 이들도 있다. 자신의 직함을 부풀리거나 아예 날조한 명함을 만들어 이권개입이나 사리사욕을 취하다가 얼굴에 먹칠하는 이들을 보기도 한다. 나는 가족 모임에서 아들과 딸, 사위에게 명함 사용의 중요성과 예절을 이따금 강조한다. 예를 들어 명함을 서로 교환할 때 두 손으로 공손하게 주고 받아야 한다고 주의시킨다. 자신의 인격이 담긴 명함을 상대가 예의를 갖추고 받는 모습을 본다면, 명함을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에게 더욱 신의를 느끼게 될 것이고 둘의 관계는 돈독해질 것이다. 예의 바른 명함 주고받기는 서로 존중하는 문화와 성숙한 사회공동체 조성에 도움을 주는 중요한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태어나서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타인에게 정중하게 알리고,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또 직업인으로서 나를 알리는 도구로 명함 한 장 지니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지난 연말 고등학교 제자들의 동창 모임에 초대받아 같이한 자리에서 제자들이 주는 명함을 받아봤다. 사회 각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살아가는 모습에 흐뭇한 마음과 보람을 느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로 부터 종종 명함을 받는다. 하지만 나는 퇴직 후 명함 없이 지낸 지 한참이 되었다. 별로 명함이 필요 없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이제 내 삶의 활동영역이 줄어들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지난날 나의 명함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두 번째 얼굴’로 기억하고 있을 나의 모습을 그들은 지금도 가끔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의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명함 없는 나는 거울을 본다. 나의 첫 번째 얼굴을 잘 간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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