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삶’을 말하다  >  인생일기 2
 
인생일기 2
글. 하재청(진주제일여자고등학교 퇴임)
유월 어느 날의 수업 한 토막이 추억처럼 떠오른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학생들을 좀 웃긴 적이있다.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웃기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버렸다. 대입 공부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면서도 잠깐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문제집 풀이에 지쳐 좀처럼 웃지 않던 아이들이 오랜만에 이빨을 드러내 놓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한참 동안 웃었다. 일의 전말은 이렇다.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를 설명하면서 화자의 소시민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나름대로는 야심차게 시적 상황과 화자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초여름날의 5교시라 그런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많은 학생이 졸고 있었다. 나는 교탁을 탕탕 치면서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털어놓았다.

“애들아, 내가 수업하다가 잠시 졸더라도 이해해라.” 갑자기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어제 일반 폰을 갤럭시 노트 스마트폰으로 바꾸었거든. 사용법을 익히고 필요한 앱을 다운받느라 잠을 거의 못 잤어. 완전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기분에 작업을 중간에 그만둘 수가 없었어. 계정도 만들고 소통을 위해 페이스북도 다운받고 트위터도 다운받고…” 내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아이들의 말문이 터졌다. “그럼 이제 선생님도 페이스북 하겠네요? 우리 친구 해요.”, “선생님, 앞으로 페이스북에 글도 올려요. 우리 이러지 말고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수업해요. 그 안에 국어 교실 그룹도 하나 만들어요.” 한 아이가 말을 하고 또 다른 아이들이 맞장구치며 합창이나 하듯이 깔깔거렸다. 김수영의 시는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갑자기 생기를 찾은 아이들이 한편으론 얄밉기도 했지만 나도 횡설수설하며 멋대로 웃어버렸다. 그러다 다시 학습교재로 돌아갔는데, 제시된 시의 표현상의 특징을 묻는 문제의 선택지 중 ‘연쇄법’이 나왔다.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가도 되는데 이날 따라 거창하게 예를 들면서 노래까지 부르고 말았다. 이미 나의 스마트폰으로 인한 아이들의 웃음에 내 마음이 약간 고양되어 있기도 했지만, 이왕 내친김에 초여름의 오수(午睡)로부터 아이들을 확실히 해방시켜 주자는 마음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원숭이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언어유희의 끝을 맺고, 김세환의 ‘오, 사랑’이라는 경쾌한 노래로 대미를 장식하니 때아닌 연쇄법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달보다 더 맑고 별보다 더 높았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는 건 바나나, 바나나는 무지무지 길어, 긴 것은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른 것은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은 건 하늘 위의 구름, 구름보다 더 높은 건 달, 달보다 더 높은 건 별, 별보다 달보다 달보다 별보다 더 높은 건 우리들의 사랑, 오 사랑~ 내 사랑아~” 연쇄법이 문제 해결의 핵심도 아니고, 우리 아이들이 연쇄법을 모를 리 없었건만 초여름 5교시 어쩌다 노래로 대미를 장식하니 교실은 완전히 웃음과 생기로 넘쳐흘렀다. 잠시나마 나도 주제를 다 잊어버린 채 세상의 우환거리를 다 내려놓고 마음껏 웃어버렸다.

살아가면서 저토록 천진난만한 웃음을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나도 오랜만에 천진난만하게 활짝 펼쳐진 아이들의 얼굴을 거울삼아 잠시 책을 덮고 나의 웃음을 마음껏 펼쳐 놓았다. ‘애들아, 다음 시간에 또 보자.’ 웃느라 정신없는 아이들에게 인사도 받지 않고 그냥 교실을 나왔다. 그래도 어느 유월의 내 발걸음은 정중한 인사보다 더 값진 아이들의 웃음 세례를 받아서인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김수영 시인의 시에 나타난 소시민성도 알아야 하지만, 때로는 이런 웃음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인생일기> 독자 참여 안내
「사학연금」에서는 연금수급자 선생님의 일상이 담긴 수필작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학연금과 관련된 연금수급 에피소드, 제휴복지서비스를 이용한 가족여행 등 다양한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채택되신 분께는 소정의 상품권을 드립니다.
  • 원고분량 : A4 1장 반 내외(글자 크기 10포인트 기준)
  • 참여방법 : magazine@tp.or.kr로 이름, 전화번호와 함께 작품을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