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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글. 한판암(경남대학교 퇴임)
젊음을 담보했던 일터에서 물러난 이후 매일 상당한 시간을 글을 읽거나 쓰는 데 할애하고 있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기초를 닦으며 공력을 들였었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이 따르지 못하고 후천적으로 신실하지 못함 때문일까. 글 동네의 충수꾼 노릇을 할 뿐 글다운 글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세월만 축내는 어정잡이 글쟁이다. 하기야 생의 앞그루이며 전작(前作)으로 일모작이었던 젊은 날의 이룸이 밋밋하고 하찮아 내세울 게 당최 없다. 그런 이유로 앞그루 뒤를 이은 후작(後作)으로써 이모작에 해당하는 글쓰기에서 성공의 기대는 백년하청으로 터무니없는 남가일몽이리라. 지천명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생의 모두걸기를 했던 일터에서 내려서는 순간부터의 삶을 고민하는 계기가 있었다. 그때 오랜 번민 끝에 전공인 컴퓨터공학과는 거리가 먼 수필을 쓰면서 살고 싶어 다양한 수필론 책을 비롯해 수필집을 손에 닿는 대로 탐독하며 내공을 쌓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문예지 신인상을 통해 등단 절차를 마치고 정식으로 글쟁이의 요건을 갖췄다.

등단 이후 쉼 없이 수필을 쓰다가 정년을 맞은 이후 아홉 해째인 여태까지 글에 관련된 몇 가지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 생의 후작에 진력하는 중이다. 그 첫째로 그동안 썼던 작품을 정리하여 수필집 13권과 칼럼집 1권을 출간했다.
한편, 현재 출간을 대기하고 있는 작품이 얼추 책 3권 정도의 분량이 되며 앞으로도 중단하지 않고 계속 쓸 요량이다. 둘째로 재작년부터 뜻을 함께하는 글밭지기 그룹(15명 내외)을 대상으로 수필 창작 특강(월 2회로 매회 2시간) 강사로 활동하면서 나 자신과 도반들이 글 농사에 매진하고 있다. 셋째로 서너 개의 문학지에서 시행하는 신인상 응모자들의 작품을 심사하여 당선자를 선(選)하는 심사위원으로서 심사평을 써 온 지 꽤 됐다.
흔히들 백세시대 운운한다. 이런 맥락에서 젊음을 불살랐던 일터에서 퇴임한 뒤에 적어도 30, 40년 이상의 삶을 누려야 한다. 하지만 나라에서 삶의 환경을 조성해 주거나 일자리를 책임지지 않는다. 결국 개인적인 영역의 문제는 각자 도생하는 길밖에 뾰족한 묘수가 없다. 이런 팍팍한 현실에 대응책으로 정년 이후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래전부터 꿈꿔온 길에 몰두하기로 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선택한 생활 패턴이다. 우선 규칙적인 생활 리듬이 깨지면서 우려되는 건강 문제를 해결할 생각에서 매일 오전 세 시간 남짓 등산을 미련할 만큼 반복하고 있다. 한편 오후부터는 외출할 경우를 제외하면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그러다가 지치거나 싫증나면 인터넷에 접속해 서핑하는 게 대강의 일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내생의 후작에서 주업은 글밭을 경작하는 글밭지기이다. 꿈은 저만큼 높고 고상한데 재능이 따르지 못해 허둥거린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넓고 깊어도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을 요량이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하지 않던가. 열성을 다하면 천우신조로 글다운 글 하나라도 건질 축복이 따를지 모른다는 꿈을 꾸며 황혼의 뜻을 여봐란듯이 이뤄보고 싶다.

선조들은 세상을 옹골지게 잘 살았다고 자랑하려면 회갑(回甲), 회혼(回婚), 회방(回榜) 등의 3갑(三甲)을 맞아야 한다고 일렀다. 이 같은 3갑의 향유는 언감생심이고 기껏해야 생의 앞그루인 젊은 시절의 삶과 엇비슷한 후작도 벅차 휘청대는 사실에 혼란을 겪는 경우가 숱하다. 이런 처지를 면할 묘방을 찾기도 어려운 암울하고 우중충한 노년의 삶에서 원하는 길을 찾아 매진할 수 있음은 로또에 당첨된 행운에 비견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