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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글. 함계순(미림여자정보과학고등학교 퇴임)
평소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드넓은 광야를 달려 보는 게 꿈이었는데 우연찮게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이 이렇게 쉽게 나에게도 실현되다니 사실 조금 얼떨떨하기도 했다. 지난 팔월 말 모 문학회에서 가을 문학기행으로 연해주 역사문화 탐방에 함께할 회원을 모집한다는 메일이 왔다. 연해주라면 지난 수십 년간 우리의 의식 속에는 존재도 하지 않았던 적국 러시아의 먼 땅으로,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떠올리게 했던 차가운 동토 아닌가. 그곳을 가본다는 생각은 사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갈 수 있게 되다니 세상 참으로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심 끝에 참가하기로 했다. 이 여행 일정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까지 모스크바행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는 일정이 포함돼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보통 열흘 이상을 밤낮없이 달린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연해주의 주 청사가 있는 하바롭스크까지 열한 시간만 열차를 타는 단일 여정이었다. 기차 여정이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기차 타는 시간이 밤 아홉 시부터 다음 날 아침 여덟 시 반까지의 야간 승차라는 것이었다. 맑은 햇빛 아래서 드넓은 대륙의 자연을 바라보며 기차여행을 하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는 즐거운 기대를 갖고 하루하루 출발 날짜를 기다려 왔는데 야간 기차를 타게 된다니 자칫 시베리아 기차를 타려던 내 작은 꿈이 헛꿈이 되는 게 아닐까 해서 여간 유감스럽지가 않았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우수리스크까지 이동하는 동안은 대낮이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스치며 약 두 시간을 달리다 보니 광량한 시베리아의 진면목이 한눈에 들어와 야간 기차에 대한 유감이 말끔히 씻겨나가고 생생한 대륙 현장을 기분 좋게 감상할 수 있었다.

창밖으로 광활한 대지가 지평선을 따라 천연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때론 붉은빛의 들녘이 밀물처럼 다가오고 때론 민둥민둥한 언덕이 드넓은 강물처럼 흘러간다.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데 희끗희끗 하얀 자작나무 줄기가 울타리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거친 수풀은 바람결에 이리저리 눕기도 하고 갈색 밀밭이 끝없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곳이 그 유명한 시베리아라는 곳이었다.
안내인의 말로 이 광경이 그대로 모스크바까지 계속이어진다니 어찌 이 나라의 대지는 이리도 넓단말인가! 고려인(한인들)의 정착지 우수리스크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버스에서 내리자 후드득후드득 얇은 비가 바람결에 흩날린다. 잠시 후 해가 다시 반짝 얼굴을 내밀자 안내인은 일정을 계속 진행한다며 이상설 열사의 재를 뿌린 수이픈강으로 이끈다. 수이픈강은 발해의 최후 저항지로 피가 강물이 되어 흘렀다고 해서 수이픈강(슬픈 강)이라 한다. 고종 황제의 밀서를 안고 헤이그 만국 회의에 참석하러 갔던 열사들은 아무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올 고국은 이미 없었으니까. 열사의 유허비가 외롭게 서 있는 수이픈강을 뒤로한 우수리스크의 마지막 일정은 라즈돌리노예 역사를 탐방하는 것이었다. 십칠만 명의 연해주의 한인들(고려인들)이 짐짝처럼 실려서 알지도 못하는 중앙아시아 어디론가 쫓겨난 곳이다.
막상 라즈돌리노예 역 현장에 도착하니 나지막한 작은 건물이 말끔하게 정돈은 되어 있었지만 기차역이라 하기엔 어이없이 작고 허술해 눈에 띄지도 않을 간이역이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니 텅 빈 방이 휑한 게 이곳이 기차역이라는 아무런 표식이 없다. 썰렁한 역사를 나와 철로 길을 따라 가보니, 타고 내리는 승강장조차 보이지 않고 지나는 어떤 기차도 서지 않는다. 어디에도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화물 기차에 강제로 실려 차가운 죽음의 땅으로 쫓겨났던 한 많은 조상들의 울부짖음이나 일본 스파이란 누명으로 처형당한 수천 선조들의 절망, 그 흔적이 없다. 라즈돌리노예 역은 이제 오직 철길 옆에 역사(歷史)를 잊은 채 외로운 폐 역사(驛舍)로 남아 있을 뿐이다. 4인 1실의 침대차는 승객들의 짐이 너무 많아 의자 밑이나 간이탁자 밑까지 전혀 공간이 없다. 일단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드나들기는커녕 숨도 못 쉴 만큼 비좁아 이동이나 움직임이 여간 힘든게 아니다. 복도는 겨우 한 사람만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고 열차의 규칙상 밤 열한 시 이후엔 모두 의무적으로 불을 끄고 자야 한다. 피곤한 여독을 조금이라도 풀어보려 접힌 침대를 펼쳐 놓고 잠을 청해보지만 잠자리가 달라져서인지 잠이오지 않는다. 자정이 훨씬 지났지만 옆 칸에서도 두런두런 말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기차는 윙윙 달리면서 간간이 철거덕 철거덕 하는데 머릿속엔 온갖 상념이 끊이지 않고 밀려든다. ‘이불 보따리와 솥단지를 둘러멘 고려인 아버지 곁에 올망졸망 아이들이 배고파 울고 있지 않은가. 연로한 노인들을 부축해 잔인한 기차에 올라타야 하는 아낙이 악을 쓰며 울부짖는 절규가 귀를 때린다. 아아! 나라 잃은 백성은 이렇게 강제로 끌려다니다가 끝내 팽개쳐지고, 그리고 쫓겨나는구나! 어디선가 그래도 된다고 하는 듯한 비웃음 소리도 들려온다. 나라가 없는 사람들이니까. 아무도 막아주지 않고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말해 줄 사람이 없는 가엾은 고려인들이 울고 있다.’ 다시 뒤척거린다. 여전히 기차는 대륙을 윙윙달린다. 어느덧 창밖이 어스름 해지고 출입문 밖 복도의 커튼 사이로 새벽빛이 잠시 기웃하더니 드디어 그 한가운데로 빨갛게 달군 불덩이가 슬금슬금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대륙의 새벽을 가르며 지평선 위로 붉게 떠오른 일출을 보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 해진다. 그냥 벅차오르는 감동이다. 순간 가슴을 억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활화산처럼 폭발해 나가듯 영혼까지 시원해진다. 어둠속에서 불뚝 솟아오른 저 붉은 태양이 이제 모든 어둠은 가버렸다고 벙실벙실 웃음을 준다. 우리도 모두 씩씩하게 일어나 더욱 힘차게 밝은 미래를 일구어 다시는 나라를 잃는 민족이 되지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