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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일기 1
글. 장기성(대구가톨릭대학교 퇴임)
‘황혼이혼’이란 말이 낯설지 않다. 퇴직한 남편은 이사하는 날, 강아지라도 안고 있어야 아내에게 버려지지 않고 함께 이사할 수 있다는 웃지 못할 농담도 한때 회자된 적이 있다. 7년 동안 메모지로만 대화를 나눠온 팔순의 노부부에게 법원이 이혼을 허락했다는 뉴스도 있다. 이런 뉴스에서 수난을 당하는 쪽은 대부분 남편이다. 사람들이 남편 수난을 당연한 귀결처럼 받아들이는 것 같아 한편으론 측은하고 안쓰러운 생각까지 들곤한다.
황혼이혼의 원산지인 일본에서는 별다른 준비없이 은퇴한 50∼60대 남편들을 ‘누레오치바濡れ 落ち葉’, 즉 ‘젖은 낙엽’이라 부른다. 구두나 몸에 붙으면 쉽게 떼어지지 않는 젖은 낙엽처럼, 퇴직 후 종일 집에 있으면서도 집안일을 도와주지 않는 남편을 빗댄 말로 ‘제대로 떨어지지도 않으면서 쓸모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또 ‘소다이고미粗大ごみ’라는 말도 있는데, 낡은 장롱이나 책상처럼 돈까지 줘가며 버려야 하는 덩치 큰 쓰레기를 뜻한다. 밖에서 산업 전사로 일하다가 나이 들어 퇴직하고 집에 들어오니 아내고 자식이고 아버지를 ‘소다이고미’ 취급하는 게 일본에서 사회적 문제가 된 지 오래다. 그 신세를 면하려면 다음의 20개 질문에서 ‘그렇다’라는 대답이 17개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한다. 10개가 안 되면 ‘젖은 낙엽족’이 될 팔자란다.
‘젖은 낙엽’ 자가 진단 설문지
①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난다 ② 이불을 스스로 펴고 갠다 ③ 라면, 달걀프라이 말고도 할 수 있는 요리가 있다 ④ TV 안 보고도 혼자 집에서 잘 논다 ⑤ 밥을 짓는다 ⑥ 설거지를 한다 ⑦ 청소기를 돌린다 ⑧ 세탁기를 돌린다 ⑨ 빨래를 널고 갠다 ⑩ 화분에 물을 준다 ⑪ 단추를 단다 ⑫ 구두를 닦는다 ⑬ 목욕물을 받는다 ⑭ 혼자 장을 본다 ⑮ 쓰레기 분리수거를 한다 ⑯ 속옷, 양말 있는 곳을 안다 ⑰ 중요한 서류 둔 곳을 안다 ⑱ 동네 세탁소를 알고 간다 ⑲화장지 싸게 파는 곳을 안다 ⑳쌀값, 채솟값을 안다
평생 ‘출근형 인간’으로 살며, 직장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다 은퇴하면 백수티 안 내려고 집에만 붙어있게 마련이다. 흔히 말하는 하루 세끼 꼬박꼬박 받아먹는 ‘삼식이’가 되기 십상이다. 오죽했으면 ‘은퇴남편증후군(Retired Husband Syndrome)’이란 말이 사전에 버젓이 등재되어 있겠는가. 이 증후군은 사소한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잔소리가 심해지는 행동을 말하는데, 남편에게 잔존한 행동 패턴을 힐난하는 부정적 증상의 병 이름이다. 시중에 이런 말도 회자되고 있다. 50~60대 남자에게 꼭 필요한 5가지는 아내, 마누라, 와이프, 마나님, 애 엄마인 반면에, 여자에게 꼭 필요 없는 5가지는 남편, 신랑, 허즈번드, 영감, 애 아빠란다. 농담치고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화가 나기보다 우울해진다. 그래서 일본의 은퇴자들은 ‘전국헌신적남편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가능한 아내 곁에 오래 버틸(?)전략을 짜고 있단다. 이들은 아침마다 이렇게 외친다고 한다.
“아내를 이길 수 없다! 이기지 않는다! 이기고 싶지 않다!” 처절한 외침이요, 몸부림이다. 삼성은퇴연구소가 얼마 전 50~70대 남녀 은퇴자의 여가활동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아내들은 하루 4시간 안팎을 가사에 쏟는 반면, 남편들은 기껏 한 시간쯤만 거들어준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오태진 논설위원의 아래 통계도 이채롭다.

남자가 하루에 TV 보는 시간은 50대 4시간, 70대 4시간 30분으로 갈수록 늘었다. 여자의 2시간 45분과 3시간 35분보다 훨씬 길었다. 잠자고,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 빼면 하루 11시간쯤 남는다. 은퇴 후 삶을 대략 20년으로 어림잡아도 8만 시간이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한 해 평균 근로시간이 2,261시간이니, 현역 시절 36년간의 인생과 맞먹는다. 취미도, 돈도 없어 소일거리가 마땅찮다는 건 핑계라는 주장도 있으나, 역설적으로 흥미롭게 들린다.
젖은 낙엽 증후군을 극복하는 지혜와 노하우로 채정호 교수는 다음의 네 가지를 제안하고 있다. 첫째, 어떻게든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라. 바쁜 사람은 가족과의 시간을 약속 시간으로 일정에 포함해 잡아두어야 한다. 퇴근 후 집에가는 것이 아무 일도 없는 날이 아니라 가족과의 약속으로 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 약속은 가급적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어기지 않도록 하라. 사업상 만난 사람, 친구, 동료들은 은퇴하고 늙으면 서로 만나기도 쉽지 않다. 죽을 때까지도 만나야 하는 중요한 사람은 가족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그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 약속을 무시하지 마라. 둘째,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취미나 활동을 만들어라. 평생 다른 방식으로 살면서 대화도 안해왔다고 하면 수십 년을 함께 살았을지라도 무엇 하나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운동이든 취미든 간에 평소 아내와 함께해오던 일이 있다면 퇴직 후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셋째, 꼭 아내와 함께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많이 기울여라. 자꾸 거치적대지 말고 스스로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만들어 내라. 넷째, 아내와 가족에게 쉴 새 없이 칭찬하라. 어쩌다 보는 아버지에게 지적받고 야단맞는다면 건강하게 살 수 없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어도 참아라. 내 몸 깊은 곳에 ‘사리’가 생기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참아야 한다. 물론 옳은 말도 해야 하고 가르치고 싶은 것도 있지만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친절하게 말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가부장적인 우리나라 남편들에게는 특히 더 어려운 일일 수 있지만, 참는 것이 바로 자신도 행복하고 가족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것을 믿으시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현실적 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꼭 ‘누레오치바’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혼자 있을 때 ‘당차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심리적 독립’, ‘경제적 자유’, ‘확고한 자아 정체성을 마련해 나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세월을 거듭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세월은 주름을 피부에 새기지만, 열정을 잃으면 주름이 영혼에 새겨지니, 자신감을 잃고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이면 마음이 시들고, 영혼은 먼지로 흩어지리라’는 새뮤얼 울만의 시 「청춘」이 왠지 오늘따라 젖은 낙엽과 겹치면서 용기를 준다.
새뮤얼 울만이 한국의 현실을 모르고 읊은 감상적인 시일지는 몰라도, 그의 시가 어쩐지 우리나라에도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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