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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일기 1
글. 박춘서(경남대학교 퇴임)
“만세!”
캐나다 밴쿠버 출발 인천행 대한항공 KE 072기의 좌석에 앉으며 탈출(?)의 기쁨을 그렇게 표했다. 순간 ‘아차’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만세 소리에 놀란 사람이 있지 않나 살펴보기 위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동조 내지 이해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와 같은 처지인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나와 집사람은 캐나다에서 석 달여간 손자, 손녀를 보살피다 그 임무를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터였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 나는 탈출에 성공한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임무의 의미는 성스러웠으나 그 수행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육체적 힘듦보다 마음고생이 더했다고나 할까?

우리 부부는 다섯 살짜리 장애 2급 아이와 갓 20개월이 된 쌍둥이를 돌봐야 했다. 물론 낮에는 아이들이 없었다. 큰 애는 장애인 특수학교에, 쌍둥이는 어린이집에 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 임무는 아이들의 아침 등교 준비와 오후에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아이들 부모는 맞벌이하느라 아이들과 비슷한 시간대에 집을 나갔다가 비슷한 시간대에 들어왔다. 아침 준비는 아이들을 깨우는 일부터 시작된다. 아이들이 시간 맞춰 일어나주면 좋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 그때부터 실랑이다. 다음은 아침밥 먹이는 것, 이 또한 만만치 않다. 새벽부터 일어나 밥맛이란 게 있을 리 없다. 그다음은 옷 입히기, 그래도 셋 중 가장 수월한 일이다. 오후에 아이들이 집에 오면 그때부터는 야단법석, 그것은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계속된다.

아이들이 없는 낮 동안 나는 자유 시간을 갖는다. 8시간 정도는 집에서 자유를 누리니 좋지 않으냐고 할지 모르지만 집에만 있는 것도 쉽지 않다. 물론 밖에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캘거리는 도시 중심을 제외한 변두리의 주택가는 고요그 자체다. 모두 직장에 가 있는 듯 거리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간혹 나처럼 산책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긴 한다. 그러나 그 산책이라는 것이 너무 단조롭다. 특히 우리가 살던 곳은 신흥주택지여서 거리가 자로 줄을 친 듯 곧아 단조로우며 집들의 모습도 비슷비슷하여 흥미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산책도 건강만을 위한 산책이 되어 1시간여로 끝내고 집으로 오게 된다.
한편 아내는 아이들 음식 준비, 그리고 딸 부부의 음식 준비로 항상 분주하다. 그에 비해 나는 마냥 빈둥빈둥이다. 그나마 책이 있어 다행이었다. 선생이란 직업으로 책을 가까이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그것으로 킬링타임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정년 후 관심을 갖게 된 동양고전, 그중에서도 ‘장자’를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좋은 해설서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아이들과 100여 일간의 씨름은 만만치가 않았다. 물론 즐거움도 있었다. 아이들이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을 보고, 때로는 어제는 안 하던 재롱을 오늘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아! 이게 생명이구나, 그리고 축복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들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먹이기 위해 때로는 쇼를 하면서 아이들의 성장을 확인하고, 삶을 확인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언제 이렇게 직접 생생하게 삶을 확인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언제 우리 아이들의 똥 기저귀를 갈아 주었는가 돌이켜본다. 없다. 그들을 길러 시집, 장가보내어 나도 애들을 키워낸 아버지야, 라고 자부하지만 그들이 성장하는 동안 진정 기저귀를 몇 번 갈아주고, 목욕을 몇 번이나 시켜줬는지. 논문 쓴다고, 강의 준비한다고 아내에게 내맡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 아내는 고맙게도 혼자 그 많은 일들을 묵묵히 잘도 해냈다.

뒤늦게 나는 내 자식들의 기저귀를 갈아주지 못한 것을 만회라도 하듯 손자들의 기저귀를 매일 기꺼이 갈아주며 삶을 확인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나에게 큰 의미를 주었다. 다시 말해 한 가장으로서 아이들의 삶에 이렇게 깊숙이 들어온 것은 축복이었다. 나의 인생을 퍼즐로 짜 맞추어 그려낸다면, 여러 개의 퍼즐로 맞추어 나라는 인간을 표현하리라. 그중 중앙 어디쯤 육아라는 퍼즐 조각도 있으리라. 그 퍼즐의 색깔은 아마도 회색이거나 허상으로 그려진 그런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이번 캐나다에서의 105일간이 그 퍼즐의 색깔을 바꿔놓은 것 같다. 일곱 빛깔 무지개 색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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