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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일기 2
글. 박응국(경희대학 부속병원 퇴임)
늦가을 잘 익은 홍시를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함께 다른 과일보다 유난히 홍시를 좋아하셨다. 감나무는 바람이 세찬 고장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 아늑하고 온화한 지방에서 산언덕을 기대고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이른 봄 나뭇가지에 연초록 잎이 돋기 시작하면 벌써부터 감나무는 그 특유의 잎을 자랑하게 된다. 그 잎이 차츰 짙은 색으로 변하다가 반질반질 윤기가 오르면 감꽃이 피기 시작한다. 하얀 달밤에 꼭지 빠진 감꽃이 사각사각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아무리 둔한 감성의 소유자라도 그 소리에 끌려 뜰에 나가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한여름 윤기 흐르는 감나무 잎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감꽃이 떨어지는 계절이 도래했을 때 감꽃을 실에 꿰어 목걸이와 팔찌를 만들어 놀던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즐거움도 컸다. 감나무는 감이 열려 그것이 붉게 물들면서 절정에 이른다. 한밤 자고 나면 나날이 굵어지다가 점점 붉게 물들어 가는 감을 바라보노라면 자연은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색깔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감탄하게 된다. 마치 작은 주황색 보석이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듯한 착각에 빠지니 말이다. 빨갛게 익어 가는 감을 따 먹기조차 아까워 그대로 바라보며 말랑말랑할 때까지 기다리다 마침내 여름부터 준비해 놓은 망태로 따게 된다. 우리 집에서 감 따는 일은 가을의 중요 행사 중의 하나였다. 감은 집안 식구뿐만 아니라 이웃이나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까지 훈훈한 인정을 베푸는 먹을거리가 되었다.
어찌 사람뿐이랴. 감나무로 인해 사방에서 날아든 새들은 새벽부터 뜰에 와서 재잘대기 시작한다. 그렇게 몰려든 새떼들은 마당 구석에 있는 개밥에 내려앉아 먹기도 하고, 감나무에 올라가 후식을 즐기기도 한다. 가을이 다 지나도록 익은 감을 따 내리다가 감나무에 감이 얼마 안 남으면 마저 다 따지 않고 새들의 몫으로 남겨놓게 된다. 양식을 구할 수 없는 겨울철, 감을 빨갛게 입에 묻힌 채 쪼아 먹고 있는 새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사람이 따먹는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홍시는 그 몸집이 부드러워 너나 할 것 없이 손으로 얇은 껍질을 훌훌 벗겨낸 후 격식 차리지 않고 소탈하게 먹을 수 있어 더 친근하다. 추운 겨울엔 항아리에 볏짚을 깔고 켜켜이 담아두었다가 깊은 겨울밤 차가운 홍시와 따끈따끈한 군밤을 함께 먹으면 긴 밤이 지루한 줄 모르게 지나갔다. 어릴 적 어머니가 우리의 손에 미치지 않는 다락이나 광에 갈무리해 놓았다가 출출할 때 반갑게 간식으로 내놓곤 하던 것이 바로 홍시였다. 홍시가 되기 전 깎아 말린 곶감은 아이들의 울음을 달래는 명약이 되기도 했다. 고향의 가을은 뒤뜰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들이 붉은색으로 물들며 시작되곤 했는데 그 시절이 그립고 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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