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삶’을 말하다  >  인생이모작 수기공모
 
인생이모작 수기공모
글. 노기현(경문고등학교 퇴임)
나는 1960년대 중반에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부터 서울 유학을 하였다. 중학교 시절 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 보니 우리 초등학교 동창생 남자 60명, 여자 60명 중에서 중학교에 진학한 사람은 불과 남자 15명, 여자 3명이었다. 충격적이었다. 전교에서 2∼3등 하던 여학생조차도 진학을 하지 못하고 양장점에서 일했다. 나는 그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대학 재학 중인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성남의 판자촌 근로청소년 야학 ‘제일실업학교’에 자원봉사 교사로 참여하였고, 1978년에 마포구 신수동에 야학 ‘우리배움터’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당시는 정규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근로 청소년들이 넘쳐나던 때였다. 나는 보통 대학생들이 많이 참여하는 일반 서클 활동보다는 근로 청소년의 학력 증진에 관심을 갖고 대학생활의 대부분을 야학에서 활동하였다. 이를 통해서 수많은 근로 청소년이 학력을 키워 대학에도 진학하고 공무원이 되기도 하여 현재는 사회 곳곳에서 당당한 삶을 살고 있다. 특히 어려운 환경에서도 배움을 이어가서 지금은 학령기에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하기 힘든 일들을 하며 명성을 떨치고 있다.

나는 대학 졸업 후에 야학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서울의 사립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36년간 교직 생활을 하고 2016년 퇴임하였다. 퇴임하기 10년여 전, 나는 대학 시절의 야학을 떠올리고 수소문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성남시에 있는 ‘청솔야간학교’를 알게 되어, 낮에는 현직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밤에는 그곳에서 자원봉사 교사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 후 대표(교장)직을 맡게 되어 현재까지 임하고 있다. 청솔야간학교는 학령기에 경제적 여건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성남시 지역 주민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무료 야학으로서, 학습자들에게 초졸, 중졸, 고졸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할 수 있도록 전 과목을 교육하며 수업료는 무료이고, 그동안 700여 명의 합격생을 배출하였다.
청솔야간학교의 수업은 월~금 저녁 7시에 시작되며 10시가 되어서야 끝난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영어와 수학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기초특강을 개설한다. 학생들은 대부분 중년 이상의 여학생들로 소녀 시절 이루지 못했던 꿈을 지금에야 펼치고 있는 학생들이 대다수이다. 학생들은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저녁 7시부터 시작하는 수업 시간에 맞추어 고단한 몸을 이끌고 바쁘게 등교를 한다. 매일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수업에 지칠 법도 하지만 수업시간에는 조는 학생 하나 없이 눈빛을 빛낸다.

청솔야간학교의 교사는 나를 포함하여 20여 명의 재능기부 자원봉사자들이다. 과거에는 대학생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현직교사와 회사원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야학을 단순히 졸업장을 따기 위한 검정고시 준비 학원이 아닌 진정한 학교를 만들기 위하여 ‘청솔의 노래’라는 교가도 직접 만들고, 수학여행과 입학식, 졸업식, 체육대회, 백일장, 시화전 등 정규학교에서 실시하는 다양한 체험 행사들도 매년 진행하였다. 그러면서 학창 시절을 경험해보지 못한 늦깎이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쁨과 추억을 쌓을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관동팔경 등의 장소를 골라 수학여행을 준비하고, 지각하는 학생들에게는 호통도 치고, 수업 시간에 졸면 쫓아내겠다고 엄포도 하지만, 합격한 학생들에게는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며 따뜻한 격려를 잊지 않는다.
우리 학생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공통적으로는 60∼70년대에 가정형편이 어려워 정규적인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서러움이 있다. 글을 읽고 쓸 줄 몰라서 은행에 갈 때 먼저 약국에 들러 붕대로 오른손을 감싸고 들어가서 대필을 부탁했고, 택배나 등기우편이 오면 얼른 싱크대로 달려가서 손에 물을 묻힌 후에 나와서 대필을 부탁했다는 우리 학생들…. 지난날, 자녀들이 가져오는 가정환경조사서를 쓸 때마다 학부모 학력란을 거짓으로 쓰면서 느꼈던 서러움. 소녀 시절, 남들은 하얀 컬러의 교복을 입고 할인회수권 내면서 버스 타고 등교하는데, 자기는 어른요금 내면서 공장으로 출근할 때의 심정.
이러한 늦깎이 학생들은 배움에 한이 맺혀 있다. 그래서 비록 머리가 굳었지만 열심히 배우려고 한다. 그 열정에 우리 교사들도 감응하여 알찬 수업을 펼쳐서 매년 초·중·고졸 자격 검정고시에 30명 내외의 합격자를 배출하고 있다. 나이가 60세 전후임에도 불구하고 졸업생 중에서 매년 4~5명이 대학에 진학하며, 대학 졸업 후에는 주로 평생교육사 등으로 활동하고, 특히 모교에 와서 자원봉사교사로 활동하며 자신이 받은 혜택을 남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나는 졸업식에서 소녀 시절에 근로 청소년들이 입어보지 못해서 부러워하던 그 하얀 컬러의 옛날 여학생 교복 블라우스를 입어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럴 때마다 눈물을 글썽이며 또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낀다.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2015년에 내 개인이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의 ‘생활 속 작은 영웅’에 선정되었고, 2017년에는 국민 추천 정부포상에서 청솔야간학교가 기관단체 표창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이러한 행적이 알려져 그동안 MBC라디오, 연합뉴스, 매일경제, 주간조선, 파이낸셜뉴스, 정책TV, 국방FM, 한국교육신문, 기타 여러 지방신문 등 많은 언론매체에 기사화되었다.
나는 지난 36년의 교직 생활에서 내가 가르친 제자들이 사회 각지에서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지금 참여하고 있는 야학에서의 봉사활동에 더욱 긍지를 가진다. 통계청의 자료에서 현재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학력을 보면, 초졸 미만이 250만 명, 중졸 미만이 600만 명이라고 하며, 성남시 규모의 도시에는 초졸 미만이 3만 명, 중졸 미만이 6만 명, 고졸 미만은 15만 이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배움에 대한 열망을 채워줄 수 있는 평생교육 시설은 매우 미약하다.
나는 앞으로도 이 일에 정진하려고 한다. 근자에 은퇴하신 교육동지님들 중에 청솔야간학교에 자원봉사 교사로 지원하시는 분들이 늘어가고 있다. 많은 은퇴 교육동지님들이 자기가 속한 지역에서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