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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바람 따라
글과 사진. 박동식(여행작가)
토담 사이에 간직한 이야기들…하회마을
셔틀버스에서 내려 논길을 걸었다. 차량이 다닐 수 있는 포장길이지만 양옆에 논이 펼쳐져 있으니 논길이나 다름없었다. 겨울로 접어들고 있는 계절, 바람이 차가웠다. 마을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버스정류장. 안동역과 하회마을을 오가는 246번 버스의 종점이 하회마을 안에 있었다. 정류장 앞의 초가지붕 아래에는 246번이 아니라 ‘46번 버스정류장’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오래된 안내판이 분명했다.
정류장을 지나 돌담 사이를 걸었다. 담장을 넘은 개나리 가지에 몇 개의 꽃이 피어 있었다. 계절을 착각한 개나리를 지나자 이름도 없는 집 마당 툇마루에서 고양이가 졸고 있었다. 낯선 여행자를 발견하고도 졸음을 참지 못하는 고양이. 세계적인 전통마을이 되었지만 소박한 시골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하회마을.
화경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흔히 북촌댁으로 부르는 곳이다.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북촌댁의 잿빛 기와들은 낡아 있었고 넓은 마당 앞의 사랑채 기둥과 툇마루는 본래의 색을 잃고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기와 위에서 기생하는 잡초와 사랑채에 올라서기 위해 밟아야 하는 4개의 돌계단. 이유도 없이 잠시 행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풍산 류씨가 하회마을에 최초로 자리를 잡으면서 지었다는 양진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회에서도 으뜸가는 고가인 양진당은 건물 주위에 난간을 둘러, 마치 누각과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삼신당으로 가는 길목은 비좁았다. 황토 사이에 울퉁불퉁한 돌들이 촘촘하게 박힌 돌담 위에는 입을 하나도 떨구지 않은 단풍나무와 앙상한 나뭇가지에 노란 열매만 달린 모과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다.
삼신당은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洞祭)가 이루어지고, 하회 별신굿 탈놀이 춤판이 가장 먼저 행해지는 곳이다. 바닥에서부터 여러 개의 몸통으로 분리돼 굵직하게 자라 올라간 느티나무의 수령은 무려 600여 년. 예로부터 마을 주민들이 때때로 잉태의 소원을 비는 곳이었기에 지금도 느티나무에는 새끼줄이 둘려 있고 이곳을 찾는 여행자마다 소원을 적은 종이를 새끼줄 사이에 정성스럽게 끼워 넣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발에 밟힌 종이 몇 장을 허리 굽혀 살펴보니 한결같이 누군가의 행복과 건강을 비는 글들이었다.

마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다리품을 팔다가 소나무 숲을 만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낙동강변에 제법 넓게 자리 잡은 솔숲은 북적이는 한철을 보낸 해변처럼 고요했다. 사는 것은 아무것도 급할 것이 없다는 속삭임을 여행자에게 들려주는 듯했다. 그곳에 앉아 하류로 흘러가는 낙동강을 바라보았다. 갈수기의 강변에는 커다란 모래톱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듯한 연인이 모래톱 끝자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고즈넉하고 조금은 애틋한 풍경에 넋을 놓고 있다가 여학생들의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떴다. 벚나무가 늘어선 둑길을 넘어 수확이 끝난 배추밭 사이를 걸었다. 그리고 맞은편 언덕에 자리한 원지정사. 서애 류성룡 선생이 낙향한 후, 서재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2층 누각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건물에 오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이제 충효당으로 가야 했다.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감나무들이 즐비했다.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빨간 감들이 다닥다닥 붙은 감나무들이었다. 하지만 까치들은 어디 가고 간혹 멧비둘기들만 날아와 앉아 있을 뿐이었다. 감나무가 있는 집의 처마 밑에는 어김없이 말라가는 곶감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간혹 무청까지도.

충효당은 양진당과 더불어 하회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건물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양진당은 풍산 류씨의 대종택이고 충효당은 류성룡 선생의 종택이다. 청빈한 삶을 산 류성룡 선생은 작은 초가집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충효당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손자와 제자들이 뜻을 모아 지은 것이다. 충효당이란 당호는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그의 근본적 가르침을 기리는 의미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곧바로 사랑채였다. 여섯 칸 사랑채의 양쪽 두 칸은 방이 들어서 있었고 가운데 두 칸은 대청마루였다. 솟을대문과 붙은 행랑채에는 한때 소를 키웠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황소 한 마리가 겨우 살았을 법한 우리에는 깨끗한 여물통까지 걸려 있었다. 사랑채 뒤편 내실은 여행자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대신 뒤뜰에 자리한 유물전시관으로 향했다. 류성룡 선생이 사용하던 갓끈과 관자를 비롯해 종택에 내려오는 가문의 유물들은 그 긴 시간을 버티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하회마을의 또 다른 모습… 병산서원과 부용대
이제 병산서원으로 가볼 참이었다.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까지는 약 5km 거리다. 하회마을에서 벗어나 다시 낙동강 측면으로 들어서면 길을 잘 못 들어섰나 싶을 정도의 비포장 시골길이다. 울퉁불퉁한 언덕길을 오르고 강변의 산허리를 돌면 주차장이다. 이곳부터 200m를 더 걸으면 병산서원이다. 멀찍이 내려다보이는 낙동강 물소리가 이곳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했던 병산서원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만루대(晩對樓). 나무가 자란 그대로의 모습을 살려 만든 기둥도 그렇거니와 단청은 물론 아무런 칠이 없는 모습이 여행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만루대에 올라 낙동강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서원은 인재를 키우기 위한 교육기관이지만 이곳에서라면 공부를 넘어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 류성룡 선생이 풍산읍에 있던 풍산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병산서원의 시작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병산서원은 헐리지 않았다.
해가 짧아졌다. 조금 서두르는 마음으로 부용대로 향했다. 화천서원에 차를 세우고 5분 정도 산길을 오르자 하회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부용대에 오르지 않고는 하회마을을 다 보았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추수가 끝난 논과 밭이 감싸고 있는 마을은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우러져 있었다. 강변 모래톱을 거닐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 벚나무 둑길에서 셀카를 찍고 있는 연인, 모두 아련한 풍경들이었다.
이제 예약한 헛제삿밥을 먹으러 가야 했다. 제사 음식과 같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은 음식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 헛제삿밥. 자리에 앉고 얼마 후 상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곧 한 상 가득 차려진 헛제삿밥은 제수 음식의 특성 그대로 모두 담백하고 맛깔스러웠다. 나물을 비벼 먹도록 담은 대접과 3가지의 탕이 함께 담긴 탕 그릇. 그리고 여러 가지의 전이 올려진 접시와 각종 반찬. 방금 제사를 지내고 난 것처럼 풍성하면서도 정갈한 상차림이었다. 그리고 식후에 제공되는 안동 식혜. 찹쌀 고두밥에 고춧가루와 잘게 썬 무를 넣고 발효시킨 안동 식혜는 여느 식혜와는 맛과 모양이 모두 달랐다. 마치 고춧가루로 담근 물김치와도 흡사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감칠맛이 있었다. 이제 긴 잠에 빠져드는 겨울이고 한 해가 마무리되는 12월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모두는 지난 1년 동안 수고했다. 다독이고 칭찬해 주어야 한다. 선물도 필요하다. 여행도 멋진 선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또 길을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