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내려놓자

최영규 신탄진중학교 재직

치열한 삶처럼 산에서 달린다. 자연도 달리고 사람도 달린다. 덩달아 나도 달린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고 깊은 산속에 나 홀로 서 있다.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망설이다 마음 내키는 방향으로 또 달리기 시작한다. 과거 내 산행 습관이 이랬다.

지리산 산자락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산에 익숙했다. 하지만 내가 산에 오르는 것에 등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 것은 2000년이다. 날씨가 꽤 춥던 그해 겨울 나는 모 산악회를 따라 남덕유산 산행에 나섰다. 그리고 그때부터 얼마 전까지 나는 산에 취해 살았다. 해가 갈수록 더 강하게 산을 탐닉했다. 잠자리에서도 산을 떠올리며 잠을 청하곤 했다. 산에 가면 정상까지 빨리 오르고 싶어지고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빠르게, 급기야 산에서 뛰었다. 그리고 에베레스트나 매킨리 처럼 더 높은 산의 등정을 꿈꿨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욕심이 화를 불렀다. 수년 전 지리산 종주 시간을 단축하려는 욕심에 하루에 2시간씩 사이클을 타기 시작했다. 사이클을 타다 넘어져 손목 인대를 다쳤다. 급기야 산행 출발 2일 전에 운동 도중 오른쪽 다리 아킬레스건이 끓어졌다. 몹시 당황스러웠고 절망스러웠다. 그런데 수술 후 집에 칩거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 욕심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런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산을 대상으로 끝없는 욕심을 부렸을 것이다. 사실 그 후로도 산들을 올라가 봤지만 별게 없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나에게 산들은 그저높이만 보일 뿐이었다.

‘왜 산에 가는가?’라는 질문을 사람들은 우문(禹問)이라고 한다. ‘그냥 거기에 산이 있기 때문에’라는 답이 가장 명답으로 꼽힌다. 그래도 우리가 산에 가는 이유와 거기에서 무엇을 느끼는지는 알아야겠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드는 ‘바위 위에 핀 꽃을 보고 ‘그 꽃을 뽑아 들고 내 손안에 놓고 보니…’라고 표현한 반면에, 일본의 시인 오사마 다부루는 ‘그 꽃에서 약간 떨어져 그 꽃 그대로 보고 있으니…’라고 표현했다. 똑같은 자연 현상에 대해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서양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반면에, 동양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꾀하고 있다.

어느 쪽이 더 자연의 본질에 가까운 사색일까? 아마도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후자이지 않을까? 이제 나도 자연과 합일하고 싶다. 그래서 요즈음 나는 산에서 걷기와 느껴보기를 연습한다. 그리고 산에서 떨어져 먼 곳에서 산을 보려고 한다. 산에서 내려와 멀리 떨어져 산을 보니 속속들이 산이 더 잘 보이고 무형의 것들까지 보인다. 나무와 돌은 물론 그 모든 것들이 나와 동일한 존재이며 나 역시 그들 중 하나라는 존재감을 갖게 된다.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산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먼 곳에서 산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봄에는 각종 꽃의 향연에 눈을 즐겁게, 여름에는 신록에 몸을 담가보고, 가을 단풍에서는 삶의 깊이를 가늠해 보며, 백설로 뒤 덮인 겨울 산에서는 자연의 정중함을 느껴볼 지어다. 구태여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산을 통찰할 기회는 수없이 많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사람들이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혹은 가족의 발복(發福)을 위해 기도했을 사람들의 삶을 떠올려 보고, 사람들의 발길에 닳아 움푹 패인 설악산 봉정암의 대웅전 문지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소원을 생각해 본다. 죽어서도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는 지리산 제석봉 고사목에서 사후 내 모습을 상상해 보고, 돼지평전 산길 주변 잡목들의 군락에서는 모진 비바람과 겨울 한파를 견뎌내고 생존해 온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을 거울삼아 본다. 산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어찌 이뿐이랴. 산 속에서 희열하고 오열하던 수많은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은 존재임을 깨닫는다. 결코 짧지 않은 산행에서 내가 얻은 소중한 깨달음이다. 이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산행은 그만하자. 우리 모두 산에서 함께 걷고 느껴 보자. 그리고 산을 내려놓는 여유도 가져보자.

산을 내려놓자

최영규 신탄진중학교 재직

치열한 삶처럼 산에서 달린다. 자연도 달리고 사람도 달린다. 덩달아 나도 달린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고 깊은 산속에 나 홀로 서 있다.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망설이다 마음 내키는 방향으로 또 달리기 시작한다. 과거 내 산행 습관이 이랬다.

지리산 산자락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산에 익숙했다. 하지만 내가 산에 오르는 것에 등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 것은 2000년이다. 날씨가 꽤 춥던 그해 겨울 나는 모 산악회를 따라 남덕유산 산행에 나섰다. 그리고 그때부터 얼마 전까지 나는 산에 취해 살았다. 해가 갈수록 더 강하게 산을 탐닉했다. 잠자리에서도 산을 떠올리며 잠을 청하곤 했다. 산에 가면 정상까지 빨리 오르고 싶어지고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빠르게, 급기야 산에서 뛰었다. 그리고 에베레스트나 매킨리 처럼 더 높은 산의 등정을 꿈꿨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욕심이 화를 불렀다. 수년 전 지리산 종주 시간을 단축하려는 욕심에 하루에 2시간씩 사이클을 타기 시작했다. 사이클을 타다 넘어져 손목 인대를 다쳤다. 급기야 산행 출발 2일 전에 운동 도중 오른쪽 다리 아킬레스건이 끓어졌다. 몹시 당황스러웠고 절망스러웠다. 그런데 수술 후 집에 칩거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 욕심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런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산을 대상으로 끝없는 욕심을 부렸을 것이다. 사실 그 후로도 산들을 올라가 봤지만 별게 없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나에게 산들은 그저높이만 보일 뿐이었다.

‘왜 산에 가는가?’라는 질문을 사람들은 우문(禹問)이라고 한다. ‘그냥 거기에 산이 있기 때문에’라는 답이 가장 명답으로 꼽힌다. 그래도 우리가 산에 가는 이유와 거기에서 무엇을 느끼는지는 알아야겠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드는 ‘바위 위에 핀 꽃을 보고 ‘그 꽃을 뽑아 들고 내 손안에 놓고 보니…’라고 표현한 반면에, 일본의 시인 오사마 다부루는 ‘그 꽃에서 약간 떨어져 그 꽃 그대로 보고 있으니…’라고 표현했다. 똑같은 자연 현상에 대해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서양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반면에, 동양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꾀하고 있다.

어느 쪽이 더 자연의 본질에 가까운 사색일까? 아마도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후자이지 않을까? 이제 나도 자연과 합일하고 싶다. 그래서 요즈음 나는 산에서 걷기와 느껴보기를 연습한다. 그리고 산에서 떨어져 먼 곳에서 산을 보려고 한다. 산에서 내려와 멀리 떨어져 산을 보니 속속들이 산이 더 잘 보이고 무형의 것들까지 보인다. 나무와 돌은 물론 그 모든 것들이 나와 동일한 존재이며 나 역시 그들 중 하나라는 존재감을 갖게 된다.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산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먼 곳에서 산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봄에는 각종 꽃의 향연에 눈을 즐겁게, 여름에는 신록에 몸을 담가보고, 가을 단풍에서는 삶의 깊이를 가늠해 보며, 백설로 뒤 덮인 겨울 산에서는 자연의 정중함을 느껴볼 지어다. 구태여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산을 통찰할 기회는 수없이 많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사람들이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혹은 가족의 발복(發福)을 위해 기도했을 사람들의 삶을 떠올려 보고, 사람들의 발길에 닳아 움푹 패인 설악산 봉정암의 대웅전 문지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소원을 생각해 본다. 죽어서도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는 지리산 제석봉 고사목에서 사후 내 모습을 상상해 보고, 돼지평전 산길 주변 잡목들의 군락에서는 모진 비바람과 겨울 한파를 견뎌내고 생존해 온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을 거울삼아 본다. 산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어찌 이뿐이랴. 산 속에서 희열하고 오열하던 수많은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은 존재임을 깨닫는다. 결코 짧지 않은 산행에서 내가 얻은 소중한 깨달음이다. 이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산행은 그만하자. 우리 모두 산에서 함께 걷고 느껴 보자. 그리고 산을 내려놓는 여유도 가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