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림자

배수열 대덕여자고등학교 퇴임

어떤 그림자

배수열
대덕여자고등학교 퇴임

어느 날이었다.
수업을 하다가 문득 한 학생을 보았다. 평소에는 그 학생에게서 수업을 열심히 받는 학생이구나 하는 정도밖에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그 학생의 얼굴에 그녀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녀는 어느 대도시에서 이곳 대학까지 유학 왔다고 했다. 얼굴이 희고 갸름하게 생긴, 덧니가 그녀의 매력 포인트이기도 하고, 특히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청순한 모습이 모두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그녀는 대학교 부근에서 3명의 여학생과 함께 자취를 했다. 그 자취집은 내가 하숙하고 있는 집과 바로 이웃이었다. 그녀들이 자취하는 집 바로 앞에는 부식 가게 겸 간이주점이 있었다. 우리는 그 집에 자주 들려 막걸리 한 주전자와 두부 한 모를 마시곤 했다. 그때 돈으로 막걸리 한 주전자는 60원이었고, 두부 한 모는 40원이었다. 두 명이 가면 100원으로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과가 끝나면 그 술집에서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기라 우리는 쉽게 친해졌고, 몇 번이고 야외로 놀러 가기도 했었다. 가톨릭 신자인 그녀를 따라 성당에 가기도 하고, 성당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기도 했다.

그녀는 대도시에서 모 명문 여자 고등학교를 나왔고, 나는 시골 출신, 농군의 아들이라 시골 학교의 문화생활밖에 모르고 대학에 진학했다. 음악회 같은 것은 구경도 못 했고 겨우 학교에서 단체 관람하는 영화 몇 편, 이것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누린 문화생활 전부였다. 그래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과 내가 가진 자기비하로 그녀에게 정식 프러포즈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상당히 조심스럽게 그녀를 대하였고 그녀도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았는지 나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녀와 이야기하는 날들이 거듭되니 차츰 친구나 동기 이상의 감정이 생겨 그녀가 자꾸만 보고 싶고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졸업하며 아쉬운 작별 인사만을 하고 이별하게 됐다. 대학 졸업 후 1년여 시간이 흐른 후, 교육청에 초임 발령 사령장을 받으러 간 곳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 같은 달에 발령을 받게 된 우연의 일치 등이 나를 기쁘게 했다. 그래서 반갑게 악수하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하려 했더니, 나를 대하는 것을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혼자 온 것 같지 않았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그녀를 보내 버렸다. 그 후 간혹 그녀가 생각났으나 세월 속에 잊고 지냈다.

왜 그 학생에게서 그녀의 얼굴을 본 것인가? 과연 그 학생이 그녀의 딸인가? 수업 마침 종이 울리자, 그 학생을 복도로 불러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너의 어머니의 이름이 ‘00’이가 아니냐고 물으면 틀림없이 ‘그렇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 학생의 대답은 ‘아니요’였다. 그러면서 그 학생은 갑자기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묻는 나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학생의 얼굴에서 틀림없이 그녀의 얼굴이 그려졌다. 잠시 할 말을 잃은 나는 혹시 그녀가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혹시 너의 어머니의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냐고 다시 물었다. 그 학생은 어머니가 개명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 오늘 집에 가거든 어머니의 처음 이름이 혹시 ‘00’이었는지 여쭤보라고 당부했다.

다음 날, 그 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자기 어머니의 본명이 ‘00’이가 맞다고 했다. 결혼하기 얼마 전에 ‘00’으로 개명했다고 알려주었다. 그 학생은 둘째 딸이고, 아버지는 교회 목사이시며, 위로 언니가 있다고 했다. 너무나 반가워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30년 만에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도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고 아주 반가워했다.

세상에 하고많은 학교 중에서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그녀의 딸이 다니고, 그녀도 가까운 곳에 산다니, 참으로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전생에 그녀와는 어떤 연(緣)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후 딸의 졸업식 날에 그녀와 만났고 그 후에도 몇 번 더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학창 시절의 일들은 추억으로 가슴 속에 영원히 묻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피천득 작가의 ‘인연’이라는 수필에서 ‘아사코’를 생각하듯, 오늘같이 보슬비가 소리 없이 오는 날이면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느 날이었다.
수업을 하다가 문득 한 학생을 보았다. 평소에는 그 학생에게서 수업을 열심히 받는 학생이구나 하는 정도밖에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그 학생의 얼굴에 그녀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녀는 어느 대도시에서 이곳 대학까지 유학 왔다고 했다. 얼굴이 희고 갸름하게 생긴, 덧니가 그녀의 매력 포인트이기도 하고, 특히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청순한 모습이 모두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그녀는 대학교 부근에서 3명의 여학생과 함께 자취를 했다. 그 자취집은 내가 하숙하고 있는 집과 바로 이웃이었다. 그녀들이 자취하는 집 바로 앞에는 부식 가게 겸 간이주점이 있었다. 우리는 그 집에 자주 들려 막걸리 한 주전자와 두부 한 모를 마시곤 했다. 그때 돈으로 막걸리 한 주전자는 60원이었고, 두부 한 모는 40원이었다. 두 명이 가면 100원으로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과가 끝나면 그 술집에서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기라 우리는 쉽게 친해졌고, 몇 번이고 야외로 놀러 가기도 했었다. 가톨릭 신자인 그녀를 따라 성당에 가기도 하고, 성당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기도 했다.

그녀는 대도시에서 모 명문 여자 고등학교를 나왔고, 나는 시골 출신, 농군의 아들이라 시골 학교의 문화생활밖에 모르고 대학에 진학했다. 음악회 같은 것은 구경도 못 했고 겨우 학교에서 단체 관람하는 영화 몇 편, 이것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누린 문화생활 전부였다. 그래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과 내가 가진 자기비하로 그녀에게 정식 프러포즈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상당히 조심스럽게 그녀를 대하였고 그녀도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았는지 나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녀와 이야기하는 날들이 거듭되니 차츰 친구나 동기 이상의 감정이 생겨 그녀가 자꾸만 보고 싶고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졸업하며 아쉬운 작별 인사만을 하고 이별하게 됐다. 대학 졸업 후 1년여 시간이 흐른 후, 교육청에 초임 발령 사령장을 받으러 간 곳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 같은 달에 발령을 받게 된 우연의 일치 등이 나를 기쁘게 했다. 그래서 반갑게 악수하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하려 했더니, 나를 대하는 것을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혼자 온 것 같지 않았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그녀를 보내 버렸다. 그 후 간혹 그녀가 생각났으나 세월 속에 잊고 지냈다.

왜 그 학생에게서 그녀의 얼굴을 본 것인가? 과연 그 학생이 그녀의 딸인가? 수업 마침 종이 울리자, 그 학생을 복도로 불러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너의 어머니의 이름이 ‘00’이가 아니냐고 물으면 틀림없이 ‘그렇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 학생의 대답은 ‘아니요’였다. 그러면서 그 학생은 갑자기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묻는 나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학생의 얼굴에서 틀림없이 그녀의 얼굴이 그려졌다. 잠시 할 말을 잃은 나는 혹시 그녀가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혹시 너의 어머니의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냐고 다시 물었다. 그 학생은 어머니가 개명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 오늘 집에 가거든 어머니의 처음 이름이 혹시 ‘00’이었는지 여쭤보라고 당부했다.

다음 날, 그 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자기 어머니의 본명이 ‘00’이가 맞다고 했다. 결혼하기 얼마 전에 ‘00’으로 개명했다고 알려주었다. 그 학생은 둘째 딸이고, 아버지는 교회 목사이시며, 위로 언니가 있다고 했다. 너무나 반가워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30년 만에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도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고 아주 반가워했다.

세상에 하고많은 학교 중에서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그녀의 딸이 다니고, 그녀도 가까운 곳에 산다니, 참으로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전생에 그녀와는 어떤 연(緣)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후 딸의 졸업식 날에 그녀와 만났고 그 후에도 몇 번 더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학창 시절의 일들은 추억으로 가슴 속에 영원히 묻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피천득 작가의 ‘인연’이라는 수필에서 ‘아사코’를 생각하듯, 오늘같이 보슬비가 소리 없이 오는 날이면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