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좋은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은 자신과의 관계에 달렸다고 한다. 은퇴 전 몸담았던 시간 속에서 생겨난 관계는 퇴직 후 6개월이면 소멸되기 쉽다. 진정한 나를 찾고 나와의 관계, 나아가 가족,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고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글 # 구승준(번역가·칼럼니스트)
한 강연에서 들었던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늘 가던 단골 식당에서 따뜻한 대우를 받곤 했다. 식당 주인은 “공깃밥은 공짜니까 마음껏 드세요”라며 푸근한 인심을 보였다. 그런데 은퇴한 뒤 다시 그 식당을 찾았을 때는 상황이 달라졌다. 공깃밥을 추가로 요청하자, 주인은 돈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예전에 마음껏 드시라며 웃음 짓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는 계산대에서 공깃밥 값을 내야 했다. 그 자리는 여전히 같은 식당이었고, 주인도 같은 사람이었지만, 관계는 달라져 있었다.
몇 년 전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되었던 다른 사례도 있다. 은퇴 후 5년이 지나 자녀의 결혼식을 치른 사람이 있었다. 그는 현직에 있을 때 많은 동료와 지인들의 결혼식에 축의금을 보냈다. 이번에는 그 정성을 돌려받으리라 기대했지만, 막상 결혼식 날이 되자 예상보다 훨씬 적은 사람이 찾아왔다. 온라인으로 받은 축의금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가 한때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은 어느새 그를 잊은 듯 보였다.
'직책'을 넘어 진정한 '나'로
은퇴 후 인간관계는 현직에 있을 때보다 어렵다. 우선 사람을 대할 기회가 줄어든다. 직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지만, 은퇴 후에는 관계의 고리가 느슨해지거나 아예 단절될 수 있다. 일할 때는 동료들과 공통의 목표나 관심사를 공유하며 관계를 유지하지만, 은퇴 후에는 이를 대체할 새로운 공통분모를 찾기도 어렵다.
‘자신의 직급이나 직책이 곧 나’라는 착각에 빠지면 안그래도 어려운 은퇴 후 인간관계가 더 꼬인다. 먼저 예전과 같이 대접받으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은퇴하면 예전의 국장도, 교장도 아니다. 새로운 모임에 나가 ‘한때 내가 잘나갔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길게 하면 어느 순간 당신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남지 않게 된다.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나눈답시고 젊은 사람들에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면 머지않아 당신을 피하게 될 것이다. 밥을 사줄 테니 만나자고 해도 핑계를 대며 거절할 것이다.
데일 카네기에게 누군가가 말을 잘하는 비결에 대해 묻자 그는 “나는 그저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었을 뿐인데, 상대는 내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더군요”라고 대답했다. 만약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면 심호흡을 한번 하라. 그래도 말하고 싶다면 다시 심호흡을 하고 참으라.
2018년 신세계그룹의 유일한 여성 임원으로서 상무 직함을 갖고 일했던 정경아 씨는 임원 승진 1년 만에 퇴직 통보를 받았다. 마이너스통장 기간 연장이 거절됐고 대출 상환 압박도 들어왔다. 연봉 몇억 원을 받던 그녀는 2021년 강남에 있는 한 면접전문학원의 직원으로 취직해 최저시급을 받으며 비품 관리와 화장실 청소 등을 하기도 했다. 직장 문을 나서면 정말 무엇이든 상상 이상이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 『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일기』에서 밝혔다.
한때 교장이었지만 은퇴 후 아파트 경비로 일하거나 택시 운전을 할 수도 있다. 고위직 공무원이었지만 집에서 놀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김OO 국장’이나 ‘박OO 교장’이 나는 아니다. 나는 직책이 아니라 ‘나’다. 은퇴 후에는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기
우리는 가족, 친구, 동료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얽혀 살아가지만, 결국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다. 신학자 토머스 머튼은 ‘고독은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 상태’이며 ‘인간은 홀로 있어야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죽음의 문턱은 홀로 넘어야 한다.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질병이나 아픔도 온전히 자신이 감내해야 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일, 직책, 직급, 명예를 모두 내려놓고 나를 대면해야 한다.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본질적인 모습과 직면하며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불안, 후회와 같은 감정을 진실하게 바라보고 과거에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를 더 잘 이해하고 홀로서기가 충분히 만족스럽다면 관계는 더는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함께 시간을 나누고 경험을 공유하는 선택이 된다. 나를 위로하거나 구원해줄 타인을 기대하지 않는 순간, 관계는 오히려 더 자유로워지고 진실해진다.
가족관계의 재정립은 필수
‘인간이 고독한 혼자’임을 인지하고 자신과 온전히 대면했다면, 바뀐 환경에서 가족과 어떻게 지낼지를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은퇴 후에는 배우자, 자녀, 손주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과거에 소홀했던 정서적 교류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단순한 동거가 아니라 진정한 연결의 시간으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공개한 ‘2023년도 상담통계’에 따르면, 60대 이상의 이혼 상담 비율이 2003년부터 2023년까지 20년간 급증했다. 여성 내담자는 60대 이상이 2003년 6.2%에서 2023년 23.1%로 증가했고, 남성 내담자는 같은 기간 10.7%에서 51.5%로 증가했다.
은퇴남편증후군(Retired Husband Syndrome)이라는게 있다. 사소한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잔소리가 심해지는 행동이 대표적인 증세다. 동시에 탈진증후군(Burnout syndrome)에도 시달린다. 은퇴를 하면 권위와 명예를 모두 상실하고 마치 삶이 끝난 듯한 상실감에 시달린다.
특히 은퇴 후에 집에서 머물며 아내에게 세끼를 다 차려달라고 하는 ‘삼식이’가 되면 부부 갈등이 생기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아내는 종일 밥만 하다가 시간을 보내니 자신이 밥하는 노예인지, 가족 구성원인지 모르겠다며 서운해 할 것이다. 남편은 평생 가족을 위해 일하며 바깥에서 밥을 사 먹었고, 은퇴 후 따뜻한 집밥 좀 먹겠다는데 구박을 하니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다. 부부가 맞벌이를 했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가족관계를 다시 정립해야 한다. 진지하게 대화해 세세한 것까지 가사 분담을 다시 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아내는 설거지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남편이 미덥지 못해 ‘결국 내가 다시 해야 한다’는 푸념이 나올 수도 있다. 아내는 잔소리를 자제하고 묵묵히 지켜보고 격려해주어야 한다. 남편은 집안일도 직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해준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일처럼 해야 한다. 아내가 집안일을 제대로 못 한다고 핀잔을 주어도 ‘서툴러서 그렇다’며 양해를 구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아내에게 물어보면서 해야 한다. 명심하라. 남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주위의 것들을 바꾸려 하지 마라. 새로운 시각으로 관계를 재해석하고, 새롭게 맺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은퇴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은퇴 후에는 반드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낯설고 두려울 수 있지만, 자신을 새로운 환경에 던질 용기를 가져야 한다. 지역사회 활동이나 동호회,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이런 활동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을 넘어,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삶의 활력을 얻을 기회를 제공한다.
은퇴는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다. 과거의 직책과 명예를 내려놓고 진정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새로운 관계를 통해 함께 성장하며,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은퇴 후 삶은 자신을 재발견하고 새로운 의미를 찾는 여정이다. 그 여정에 용기를 갖고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