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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난 아이들

글.  이현기  광주동성고등학교 재직

매년 봄의 초입, 교정에는 봄빛으로 치장한 벚꽃이 찾아온다. 벚꽃이 필 무렵, 학원 산하 4개 학교는 ‘벚꽃데이’라는 행사를 운영한다. 교사와 학생들은 규격화된 교무실과 교실에서 탈출하여 벚꽃을 벗 삼아 같이 게임도 하고 함께 사진도 찍으며 각자의 잊지 못할 추억 앨범을 서로에게 선물한다.
교사 경력 최초로 올해는 고1을 맡게 되었다. 주로 고3만 맡아 왔었기에 고1로 내려가면 아이들이 얼마나 싱그러울지 내 나름 부푼 기대감이 있었다. 어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우람한 고3 아이들만 겪다가 갓 입학한 고1 아이들을 보니 체격부터 엄청난 차이가 났다. 고등학생이라기보단 중학생에 가까워 보였으니 나름 귀엽기도 하고 싱그러운 맛은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생활한 지 한 달쯤 지나자, 갱년기가 찾아온 부부처럼 학기 초 싱그러움의 농도가 점차 옅어져 갔다. 싱그럽다기보다 그냥 철이 없다는 생각이 편견처럼 내 인지 구조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학적은 분명 고등학교 1학년인데 중학교 4학년 같았으니 말이다.
2024년의 벚꽃데이가 화사하게 열렸다. 막 봄의 화장을 마친 벚나무가 유혹하는 운동장으로 전교생이 야생의 들개 무리처럼 우르르 몰려갔다. 고1 아이들은 벚꽃데이라는 행사가 처음이라 운동장 한 켠에서 우물쭈물 뻘쭘하게 모여 있었다. 난 아이들에게 우선 학급 단체 사진 먼저 찍어놓고 나머지 시간은 핸드폰을 하든, 개인 사진을 찍든 너희들 하고 싶은 거 하라는 식의 성의 없는 지시 사항을 영혼 없이 전달했다. 학급별로 단체 사진을 한 장씩 찍어서 행사를 주관하는 학생부로 제출해야 했기에 숙제를 얼른 끝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곧 닥친 수행평가처럼 급하게 단체 사진을 찍고 우리 반 아이들과 쿨하게 헤어졌다. 나는 친한 선생님이 운영하는 행사장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여고에 근무하시는 선생님께 부탁해서 믹스커피도 얻어 마시고, 벤치에 앉아 글을 읽기도 하면서 시간을 대충 때우고 있었다. 잠깐씩 우리 반 아이들의 동향을 살펴보니 여기저기 난잡하게 섞여 있어서 다시 하나로 뭉치긴 어려워 보였다. 한 학급을 보니 운동장 가운데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어울려 추억의 수건돌리기를 하고 있었다. 맙소사, 수건돌리기라니. 유치해 보였지만 그 반이 그리는 동심의 세계가 내심 부럽기도 했다. 수건을 돌리고 싶어 손과 발이 근질거렸다.
‘학급 아이들을 긴급 호출하여 숨바꼭질이라도 해야 하나’ 같은 가벼운 내적 고뇌에 빠져 있던 중 갑자기 부반장 녀석이 다급히 날 찾았다.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부반장 녀석이 뱉은 말은 사고가 난 게 아니라 내가 사고를 쳐야 하는 걱정거리였다.
“샘, 샘이 필요해요. 샘이 없으면 안 돼요.”
“왜? 뭐할 건데?”
“여장 좀 해 주세요.”
“…….”
부반장 녀석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미리 준비한 괴기스러운, 어찌 보면 MZ스러운 콘셉트 사진을 보여 주며 나에게 핑크 요정으로 변신해 줄 것을 협박했다. 안 그래도 수건돌리기를 하는 학급을 보며 동심의 세계를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었기에, 어릴 적 세일러문 만화를 가슴 설레며 봤던 추억이 있었기에 여장을 해달라는 아이들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미리 준비한 핑크색 가발과 선글라스를 쓰고 아이들이 요구하는 기괴한 포즈를 최대한 성의껏 지어주었다.
곧 쉰을 바라보는 중년의 아저씨 교사로서의 위신과 체면 따위는 포기하고, 아이들이 원하는 콘셉트의 사진을 찍는 동안 난 아이들의 얼굴에 점차 행복이 그려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저 아이가 저렇게 활짝 웃을 수도 있구나.’
‘저 아이가 말이 저렇게 많은 아이였나?’
‘저 아이한테 저런 유쾌한 면이 있었나?’
그동안 교실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진짜로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얼굴. 나의 망가짐이 아이들에겐 기쁨이란 따스한 감정을 선물해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할까? 여태껏 ‘너’와 ‘나’였던 각자의 관계성이 이젠 ‘우리’라는 모두의 관계성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 느낌이다. 앞으로 다가갈 두 걸음, 세 걸음의 발자국마다 아이들은 나에겐 또 어떤 깨달음을 선물해 줄까?
오늘 아이들이 나한테 씌워준 건 핑크색 가발이 아니라, 벚꽃색으로 물들인 따스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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