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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원이 주는 행복

글.  권형근 연금수급자

화요일 이른 아침, 날이 밝았다. 백수로서는 다소 이른 시각이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격전지(?)를 향해 시동을 건다. 차창을 여니 싱그러운 아침 공기가 코를 자극한다. ‘오늘은 기필코 상위권으로 도약해야지.’ 마음속 다짐을 통해 전의를 불태운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오늘따라 유난히 차가 잘 빠진다. 예정 시각을 훨씬 못 미쳐 도착한 ‘○○’스크린골프장. 이곳이 오늘의 격전지다. ‘권총알탄’, 어김없이 오늘의 첫 출근자다. 지하 1층에 위치한 4번 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겐 마치 전용실처럼 되어버린 방이다. 하수들만의 안식처랄까. 너나 할 것 없이 기회만 되면 벗어나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골프백을 내려놓고 출발 전에 한 다짐을 다시 한번 곱씹어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컴퓨터 전원을 켜고 효능이 검증되지도 않은 공기청정기의 ‘온’ 버튼도 눌렀다. 이어 아이언 7번을 꺼내 들었다. 아마 내 몸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일 게다. 채를 몇 번 휘두르자 ‘고갠드로현’이 들어온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자 얼마 안 되어 ‘아람바’가 나타난다. 하수들이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낭만조’도 뒤따라 들어온다. 낭만조의 눈꺼풀이 살짝 떨리는 게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를 향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하수들을 낮춰보는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오늘도 여지없이 티칭 본능을 발휘한다. 아람바가 낭만조의 지도에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반응이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미 여러 번 그 결과를 보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희망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
잠시 후 ‘월지매’와 ‘유유자적’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매화회’의 자칭, 타칭 고수들이다. 이들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이어서 ‘달밤’과 ‘똑바로샷’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 또한 고수의 반열에 오른 분들이다. 이어서 오늘도 맨 마지막에 등장한 한 사람, ‘덕담나누기’다. 가장 가까이 사는 분인데 언제나 주인공처럼 가장 늦게 나타난다. 이제 모두가 그러려니 한다. ‘3, 4, 5번 방’. 우리들의 놀이터이자 아지트랄까. 벌써 몇 년째 화요일마다 이곳에 모여 함께 웃고 즐기고 있다. 우리 모임의 명칭인 ‘매화회’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아마 내 기억에 똑바로샷이 작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잘 지었다.
‘그린 빠르기: 매우 빠름, 바람 세기: 보통, 컨시드: 1.25미터’
모든 조건을 컴퓨터에 입력시키고 동반자들과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치며 팀별로 게임을 시작한다. 4번 방. 권총알탄인 나를 비롯해 아람바, 고갠드로현이 함께 할 오늘의 놀이터다. 저마다 친 티샷이 페어웨이에 안착했다. 출발이 순조롭다. 낭만조의 원포인트 레슨이 통했는지 아람바의 티샷 거리가 제법 늘은 것 같다. 순서에 따라 나도 온 힘을 다해 티샷을 했다. 제법 잘 맞은 듯한데 한없이 왼쪽으로 날아간다. “오비이~” 결코 반갑지 않은 기계음이 방 안을 울린다. 그래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바로 첫 홀 첫 티샷에는 멀리건(벌타 없이 한 번 더 치는 기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어진 티샷. 이번엔 우탄 오비다. ‘에구, 오늘도 글렀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옆방에 있던 낭만조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하이에나처럼 그의 파안대소가 결국 내 가슴 깊은 곳을 후벼파고 만다.
중간 그룹인 3번 방과 고수 그룹인 5번 방도 치열한 분위기다. 간간이 여기저기서 버디 소식이 들려온다. “짠짜자 짠짜자잔~” “나이스 버디~” 동반자들의 축하가 이어진다. 2천 원이라는 거금(?)을 놓고 함께 경쟁하는 관계지만, 결코 경기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모두가 70 언저리에 있는 ‘나이스 가이’들이다. 한참을 지났을까. 옆방에서 “갔다~”는 외침과 함께 똑바로샷의 장탄식 소리가 들린다. 분위기상 적어도 헤저드 아니면 오비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페어웨이 한가운데가 아닌가. 그것도 본인의 닉네임처럼 똑바로! 이는 오비를 수차례 낸 나를 두 번 죽이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태다. ‘그래도 참아야 하느니라. 꾹~’
잠시 후 월지매가 내가 있는 방을 기웃거린다. “권총알탄, 너무 급해! 천천히.” 여전한 티칭 본능이 발휘된다. 코칭이 통했는지 나의 어프로치 샷이 제법 날카로워진다. 나도 잠시 분위기를 전환할 겸 옆방을 기웃거린다. 덕담나누기의 샷이 많이 무뎌진 느낌이다. 의아해하는 나를 보자 다소 체념한 듯한 말을 한다. “옛날에 내가 다 가르쳐준 사람들인데……. 쩝!” “곧 다시 회복하겠죠.”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주제넘게 위로의 말을 건네 본다. 그래도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스승(?)이니 마음이 더 간다. ‘이런 내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나도 “쩝!”
요즘 유유자적의 샷이 날개를 단 모습이다. 샷이 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졌다. 덩달아 어깨도 더욱 올라간 느낌이다. 달밤도 한동안 거리를 늘이는 데 치중하며 샷이 잠시 흔들리기도 했으나 이제 다시 본궤도에 오른 모습이다. 거리도 전보다 꽤 는 것 같다. 낭만조의 샷이 왔다 갔다 한다. 좋을 때는 타이거 우‘조’인데, 안 좋을 때는 뭐 ‘거시기’하다. 아람바의 샷도 여전히 제 모습을 찾지 못하는 것 같다. 예전 한창 잘 나갈 때 비거리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을 파워인데 말이다.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니 언젠간 빛을 발하리라. 고갠드로현도 초반에 잘 나가는 것 같았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무너지는 모습이다. 폼은 나무랄 데 없이 좋다는 고수들의 한결같은 평가인 걸 보면 곧 좋은 세상이 올 것 같기도 하다.
웃고 즐기는 사이에 어느덧 18홀을 마쳤다. 경기 결과에 따라 돈 계산이 이어진다. 희비가 교차하는 시간이다. 1등이 2천 원을 갖고 2등은 본전, 3등이 2천 원을 잃는 식이다. 후덕한 1등을 만나면 꼴찌 손에 천 원 정도는 쥐여주기도 한다. 이어서 경기 결과에 대한 월지매의 예리한 분석이 곁들여진다. 한때 고수의 방을 넘봤던 나에겐 좌절의 시간이기도 하다. 하여간 내겐 여전히 턱이 높은 고수의 방이다.
이어진 점심 식사. 우리 모임에 또 다른 즐거움을 주는, 마치 덤과 같은 시간이다. 한 주간의 삶을 소재거리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때로는 정치인이 되기도 하고, 기업 회장이 되거나 법조인이 되기도 한다. 나라를 걱정하는 면에선 모두가 애국자다. 그래도 결국엔 어김없이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간다. 마치 어린 시절의 고향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총무가 넌지시 올해 필드 계획을 말하며 회원들의 반응을 살핀다. 나도 옆에서 거들며 분위기를 띄운다. 벌써 푸른 잔디의 풀 내음이 이곳까지 나는 듯하다. 그렇게 식사 시간도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음 주 화요일을 기약하며 서둘러 일상으로 돌아갔다.

만 원이 주는 행복을 만끽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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