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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불출의 행복한 변(辯)

글.  우영태  국민대학교 퇴임

황혼길을 한참이나 지나온 이 나이에 팔불출의 자랑을 해도 그리 어리석다 할 만큼 부끄럽지는 않으리라. 살아오면서 가만히 앉아 물 한잔 가져다 달라 무슨 군것질거리 없나 하고 아내한테 요구해 본 적이 없다. 내 곁에는 항상 물컵이 놓여 있고 건강을 위해 자주 마셔야 한다는 성가신 요구만 있다. 식후 저혈당 쇼크가 걱정되어 온갖 간식거리를 때맞춰 대령하니 따로 요구할 틈이 없다.
지인이 초대한 식사 자리에서 식후 빈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향하는 그 집 남자를 보며, 나는 설거지를 해본 기억이 없는데 마지막 밥숟가락이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식탁은 치워져 있고 설거지는 벌써 끝나가는 중이다. 식후 행복 가득 담긴 따뜻한 커피 한잔 마시고 나서 빈 잔을 들고 깨끗이 치워진 싱크대에 그냥 둘 수 없어 가끔씩 아주 가끔씩 물로 헹구는 일이 내 설거지의 전부다. 분리수거를 어떻게 하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나마 쓰레기를 치운다고 싱크대 옆에 걸어둔 비닐봉지에 아무거나 넣으면 종이 쓰레기는 옆에 있는 분리통에 넣으라는 핀잔만 듣는다.
어느 모임에서 나는 하루 여섯 끼를 먹어야 한다니까 그걸 누가 차려 주느냐고 한다. 당연히 아내가 해 준다고 했더니 요즘도 그런 여자가 있느냐며 매우 의아해하더라. 당연한 것처럼 매일을 사는데 아내는 당연한 것처럼 점심 먹을 시간이네 오늘 점심은 카레밥으로 준비해야지 하고 일어선다. 아침 한 끼 눈치 보며 겨우 얻어먹고 마누라 눈앞에서 사라져 줘야 요즘의 좋은 남자라고 하던데 25시간을 성가시게 붙어 있는 나는 어떤 남자일까?
늦잠으로 뒤척이다 멸치를 듬뿍 넣고 끓이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에 눈을 뜬다. 웃고 있는 아내가 어깨를 두드리며 덜 깬 내 몸도 깨우고 있다. 당신은 어디를 가도 내 곁에 있지. 다투고 나서 꼴 보기 싫다고 해도 돌아서면 그만이고 내 생각과 다른 당신 모습이 때로는 못마땅해 잠시 미워지다가도 돌아서면 금방 궁금해지니 어느 한순간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는 내가 신기하게 느껴진다. 당신이 있어 내 삶은 아침 햇살처럼 눈부시고 근심 걱정도 마침내 찬란한 별빛이 된다. 여보, 당신은 나의 고운 그림자요, 나를 있게 하는 파라다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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