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삶의 높이 문학의 향기

이사(移徙)

글.  박중호 유신고등학교 재직

아내는 애써 웃고 있다. 30년 만에 고향으로의 귀환, 내가 늘 얘기하던 첩첩산중 오지의 고향 마을로 아내는 이사를 한다. 금의환향이었으면 좋으련만, 아니었다.
승합차에는 간단한 취사도구와 옷가지들이 실렸다. 출발을 앞두고 아내는 마당 한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친척들과 마지막 전화를 하고 있다. 아내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메어 터진다. 가는 곳이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산속이니 어쩜 마지막 통화일 수도 있겠다.
아내의 통화가 길어지고 있다. 통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또다시 벨이 울려댔다. 나는 차의 시동을 꺼버린 채 말없이 담배를 꺼내 문다. 잠시 승합차 뒷좌석 창문에 기대어 우리 집 마당 쪽을 내려다본다. 시든 지 오래된 국화 화분이 밑동에 뿌리만 남은 화분 몇 개와 더불어 마당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주인이 화분을 돌볼 여력이 없었으리라. 그나마 이젠 그 주인이 먼 길을 떠나니 저 화분들은 쓸모가 없게 됐다. 집 근처에 살고 있던 사촌 누이가 급히 달려와 홍시 한 박스를 아내에게 주며 인사한다. 사촌 누이도 이내 눈물을 훔친다. 아내는 집 마당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승합차에 올랐다.
3일 전, 담당 의사는 아내에게 호스피스병원 얘기를 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6개월 시한부 통보와 함께 설명했다. 아내는 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항암치료를 오래 받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했다. 죽음이 너무 가까이 왔다. 아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향으로의 귀환을 결정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퇴원 수속을 밟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은 오래도록 침묵만이 흘렀다.
네다섯 시간이 흐른 후, 차가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들어서면서 한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아내가 마른기침을 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10월의 가로수는 제법 단풍이 들기 시작해서 차창으로 스치는 고향 마을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당신 안 만났으면 여기서 계속 살았을 텐데, 젊었을 땐 이곳이 얼마나 답답하던지 당신이 날 구원했다고 했잖아! 죽을 때가 되니 돌아오네, 지나고 나면 다 좋은 기억만 남나 봐!”
아내의 넋두리 같은 얘기에 별 대답 거리를 못 찾은 나는 말없이 운전만 했다. 시골이 싫어 도시라는 낙원(樂園)으로 간 22살의 아내는 얼굴이 하얀 도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었다. 아내가 구원받았다는 그 결혼 생활 33년의 종착역이 이곳 아내의 유년 기억들이 숨 쉬고 있는 저 어디쯤에서 끝나는 것인가. 아내는 기억을 더듬듯 창밖을 유심히 훑는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아내의 미소다.
낮은 산등성이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두 칸짜리 작은 기와집.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당에는 늙은 감나무 한 그루와 주인 잃은 낡은 석유풍로가 옛 주인을 반긴다. 마루에 걸터앉은 아내는 긴 호흡으로 흙냄새를 들이마신다. 저 여유롭고 평화로운 아내의 모습. 33년 전 도시로 떠났던 22살의 처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내는 아직도 낙원(樂園)을 꿈꾸고 있을까. 어쩌면 아내는 머나먼 낙원(樂園)으로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돌아가신 장모님이 맛있는 단팥죽을 끓여 놓고, 도시로 간 외동딸을 애타게 기다릴 때처럼 또 마냥 기다리고 있을지도. 아내는 유년의 행복한 기억 속에다 되묻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이만하면 행복하게 잘 살았지?”
산바람이 수많은 낙엽을 하늘로 날린다. 모든 것을 비우고 바라보는 세상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그 허허로움과 자유로움으로 세상에 얽매여 힘겨워했던 모든 것들을 떨쳐버린다.
  • 공단바라기 & 독자의견

    바로가기
  • 빈칸 채우기

    바로가기